역사를 뜻하는 영어 ‘History’는 라틴어 ‘Historia’에서 파생됐다. 라틴어 ‘Historia’는 지식의 탐구·탐문이라는 뜻이다.(혹자는 History‘His + story’로 분리해 예수의 이야기라고 설명하곤 하는데 이는 견강부회적인 해석이다.) 요컨대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의 지적 탐구가 쌓여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금껏 배워온 역사를 '사실'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정설'에 불과하다. 정설은 많은 학자가 옳다고 주장하는 가설을 뜻한다. 많은 학자가 같은 가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설은 결국 가설일 뿐이다.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가설을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역사는 당시 역사가가 취사선택한 기록물(1차 사료)를 기반으로 그것을 후대 역사가가 제 나름의 해석과 판단을 더한 저작으로 구축된다. “역사책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가를 먼저 알아야 하고, 역사가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역사가를 낳은 사회를 알아야 한다(613)”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바다가 쓸어오는 모래가 쌓여 광활한 모래사장을 만들 듯, 역사도 수천 년간 역사가들의 저작이 쌓인 결과물이다. 때문에 후대로 갈수록 역사가는 힘이 든다. 읽어야 할 저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후대 역사가들은 역사학의 계보를 누군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길 소원한다. 아마 <역사학의 거장들 역사를 말하다>라는 책이 그런 책이 아닐까.


<역사학의 거장들 역사를 말하다>, 책표지 ⓒ한길사

 

역사학의 거장을 뽑다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틴 하이데거.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거장이라고 부른다. 철학 외에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거장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이 책은 역사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룬 27명의 거장을 선정했다. 레오폴트 폰 랑케, 버드런트 러셀 같은 유명인에서부터 조금은 생소할지도 모르는 학자들까지. 이 책을 통해 이들의 생애, 저작, 사상 등을 섭렵할 수 있다.

 

왜 굳이 거장을 선정하고, 거장에 관한 글을 책으로 묶어야했는지 의아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학자가 있고, 제 나름대로 연구 활동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세계에 큰 충격을 줄 만한 연구를 내놓는 학자는 소수에 불과하다.(그렇다고 다수의 학자를 폄훼할 의도는 없다.) 역사학이라는 거대한 학문의 맥을 짚기 위해서는 이 책과 같은 작업이 필수적이다.

 

여기에 제시되는 거장들21세기 초에 역사학의 개념, 이론, 방법론, 작업 유형에서 대표적인 본보기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 책의 각 장의 글을 읽으면서 역사학의 여러 단면을 두루 여행하게 되며, 이러한 의미에서 여기에 소개되는 모든 저자와 저작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역사학의 주 경향을 그려내는 모범적 단면도가 군상으로 제시되는 것이다.”(24)

 

거장을 선정하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된 기준과 기준에 대한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천차만별이라 사람에 따라 거장이라 생각하는 학자도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기준이 중구난방이거나 근거가 빈약하다면, 선정된 거장의 신뢰성에 치명적이다. 책에서 저자는 거장을 선정한 기준으로 현재적 영향력, 자극. 대작, 시대경험 등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현재적 영향력은 특정 주제, 연대, 지역 등의 좁은 범주를 넘어 보편적으로 탁월성을 인정받았는가를 의미한다. 특수한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연구는 인류라는 관점에서는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음은 자극이라는 기준이다. 거장이라면 역사가가 살았던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 역사가에게까지 중요한 자극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대작이다. 저자가 말하는 대작이란 역사적 대상과 연구문제가 모범적인 방식으로 제시된 저작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시대경험이라는 기준인데, 저자가 설정하는 기준 중에서 가장 특별하다. 시대경험은 거장의 역할을 시간적으로 한정하는 것을 뜻한다. 분명 역사가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거장의 저작을 불후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 있다. 저자의 판단에 의하면 이는 역사학의 단면도를 파악하는 데 있어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역사학이라는 맥락에서 위와 같은 선정기준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은 것은 책 속으로 들어가 직접 27명의 거장을 만나는 것뿐이다. 거기서 어떤 역사학의 단면도를 만날지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역사가를 아는 것이 진정한 역사교육

 

학창시절 친구들은 역사를 정말 싫어했다.(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렇다.) 여타 과목에 비해 외울 것이 많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였다. 학창시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1592년 임진왜란, 1875년 강화도조약, 1910년 을사늑약을 외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만약 사건과 년도를 외는 역사 공부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엄지를 치켜들고 싶다.

 

역사가가 설정한 가설의 총체인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다양한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다양한 가설을 접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교육은 정설이라는 한 가지 가설을 주입하는 식이다. 역사교육의 현실이 이 모양이니 역사교과서가 좌 편향이다, 우 편향이다아웅다웅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좌든 우든 이를 적절히 수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이 역사교육인데 말이다.

 

역사가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 진정한 역사교육이다. 하지만 정부 정책을 만드는 공직자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이상 재미없는 역사교육은 계속될 것이다. 때문에 <역사학의 거장들 역사를 말하다>와 같은 책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서 역사는 영원히 기피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문득 축구 한일전이 열릴 때면 나부끼는 현수막이 떠오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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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목 - 역사학의 거장들 역사를 말하다

  엮은이 - 루츠 라파엘

  옮긴이 - 이병철

  출판사 - 한길사

  출간일 - 2015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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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바질을 곁들여 가지로 감싸 오븐에 구운 모짜렐라 치즈. 이는 '엘본 더 테이블'의 메뉴 중 하나다. 엘본 더 테이블은 '허셰프'라는 캐릭터로 다방면에서 인기몰이 중인 최현석 셰프가 총괄 셰프로 있는 곳이다. 이곳의 메뉴 대부분이 비슷했다. 서울에 볼일이 있던 차에, 들러볼까 하고 포털사이트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던 중이었다. 이때 내가 떠올린 생각은 '길다'였다.

 

김치볶음밥, 짜장면, 후라이드 치킨 등 배달음식이 친숙한 나는, 고급 레스토랑의 기다란 메뉴에서 왜인지 모를 위압감을 느낀다. 뒤이어 메뉴가 꽤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메뉴를 본 내 감상은 여기서 끝난다.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는 이렇게 생겼네'하고 금방 넘길 것이다. 이런 나와 달리 <음식의 언어>의 저자인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이를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스탠퍼드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계량언어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컴퓨터공학자다. 그는 음식의 언어에 주목한다. 내가 그냥 지나친 메뉴에서 그는 "온갖 종류의 잠재적인 언어학적 힌트(25)"를 발견한다. 예컨대 음식을 묘사하는 글자 하나가 더 늘어날수록 해당 음식이 비싸진다는 통계 같은 것들 말이다.


<음식의 언어>, 책표지 ⓒ어크로스

 

'구별 짓기'로 보는 음식의 언어



것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 피라미드, 진시황릉 등이 단적인 예다. 인간은 수많은 욕망을 품지만, 무엇보다 '타인보다 자신이 더 나음'을 드러내기 위한 욕망이 크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별 짓기'라 명명했다. 자본가는 이 부분을 파고 든다.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이 상품은 타인과 구별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음식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먹는 것에서도 구별 짓기를 욕망한다. 때문에 레스토랑의 메뉴에서부터 포테이토칩의 광고 문구까지, 욕망을 자극하는 언어가 난무한다. 요리와 포테이토칩을 공급하는 자본가는 언어를 통해 소비자가 제품을 손에 집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메뉴와 광고 문구에서 자본가의 의도를 도출해낸다.

 

레스토랑은 자신들이 주 고객으로 삼는 계층에 따라 사용하는 메뉴의 언어가 다르다. 값비싼 레스토랑은 강박적으로 재료의 출처를 밝히고, 우아하고 장황한 단어로 요리를 묘사한다. 또한 값싼 레스토랑에는 선택할 수 있는 요리 가짓수가 훨씬 많으며, 이에 반해 값비싼 레스토랑은 주방장 추천 메뉴가 더 많다.

 

값싼 칩: 우리 칩의 그 특별한 맛은 어디에서 올까? 그건 비밀이 아냐. 만든 방법 덕분이지!


값비싼 칩: 우리는 전적으로 천연 재료를 사용하며, 모든 내용물을 손으로 직접 추려 포장하고, 모든 준비 단계에서 칩을 테스트하여 품질과 맛을 보장한다.(214~215)

 

포테이토칩 광고 문구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나타난다. 값싼 칩의 광고 문구에는 쉬운 단어와 간단한 문장이 쓰인다. 반면 값비싼 칩의 광고 문구는 정반대다. 카피라이터가 상위 계층에게는 복잡한 단어와 문장을 쓰는 편이 좋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자본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지를 반영한다(220)"는 사실을 말이다.

 

음식의 언어에서 발굴한 역사

 

"케첩, 시럽, 아스피크, 칠면조, 마카롱, 셔벗, 아락 같은 것들은 페르시아의 샤, 바그다드의 칼리프, 프로방스의 군주들, 뉴욕의 거부들이 먹던 고급 식사뿐 아니라 푸젠성 출신의 선원들, 이집트의 약사들, 멕시코의 수녀들, 포르투갈의 상인들, 시칠리아의 파스타 장인들, 애머스트의 시인들, 그리고 뉴욕의 제빵사들이 먹던 식사의 언어학적 화석이다."(346)

 

우리는 오래된 지층에서 발굴된 화석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멸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은 언어도 옛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저자는 음식에 관련된 '언어학적 화석' 중에서 일부를 발굴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책에 등장하는 것은 피시앤드칩스, 케첩과 칵테일, 와인과 토스트, 칠면조 등이다. 지면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중에서 피시앤드칩스만 소개할까 한다.

 

저자는 우리가 영국의 대표요리라고 알고 있는 '피시앤드칩스'의 기원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가 도착한 곳은 6세기 중반의 사산조 페르시아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호스로 1세 아누시르반이다. 저자는 피시앤드칩스의 원형이 호스로 왕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인 '시크바즈'라고 지목한다. 시크바즈는 새콤달콤한 쇠고기 스튜라고 한다. 피시앤드칩스는 분명 생선과 감자를 튀겨낸 음식인데 말이다.

 

저자는 독자의 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크바즈가 어떻게 피시앤드칩스로 변모할 수 있었는지 추적한다. 호스로 왕의 시크바즈는 널리 퍼졌는데, 퍼지면서 각 지역에 맞게 전용(轉用)된다. 9세기 이슬람 선원은 시크바즈의 재료로 생선을 썼다. 이어 13세기 이집트에서는 생선을 밀가루에 묻혀 튀겼다. 14세기 지중해 항구에서는 생선 시크바즈의 이름을 에스카베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6세기 에스파냐의 페루 정복 당시 에스카베체가 전해졌는데, 이것이 페루 전통 재료와 접목해 세비체가 탄생한다. 17~18세기 경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에 의해 에스카베체가 들어온다. 여기에다 19세기 중반 등장한 감자튀김이 추가돼 지금의 피시앤드칩스가 만들어졌다. 요컨대 피시앤드칩스는 수천 년에 걸친 문화적 합종연횡으로 탄생된 것이다.

 

음식의 언어에서 교훈을 얻다

 

저자는 단지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피시앤드칩스의 변천사에서 우리가 배울만한 교훈을 끄집어낸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 모두가 이민자라는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문화도 고립된 섬이 아니며, 문화와 민족과 종교 사이의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경계에서 어떤 훌륭한 특성이 창조된다."(98)

 

문화에 있어 최고와 최초를 논한다는 것은 부질없으며,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발생하는 혼란에서 어떤 창조적인 특성이 꽃피운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피시앤드칩스에 관한 것만 언급했지만 저자는 책에 언급된 다른 음식에서도 해당 음식과 관련된 교훈을 매번 추출한다.

 

<음식의 언어>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저자가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성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선언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저자는 음식의 언어가 주는 마지막 교훈인 '자비의 조리법'을 제안한다.

 

"우리 자신의 부족이나 민족의 언어적 습관과 요리 습관은 모든 부족과 민족에게 해당되는 습관이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언어와 문화는 깊은 공통성을, 우리를 인간이 되게끔 해주는 사회적·인지적 특징을 공유한다. 이런 사실들, 즉 차이에 대한 존중, 공유되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 등이 자비의 조리법에 들어가는 재료다. 그것이 음식의 언어가 주는 마지막 교훈이다." (34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제목 - 음식의 언어

  글쓴이 - 댄 주래프스키

  옮긴이 - 김병화

  출판사 - 어크로스

  출간일 - 2015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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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4 17:31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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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 그리고 기억의 저장소

[독서에세이] <행복의 건축>

 

 

언젠가 두 남자가 세계여행을 다니는 TV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 두 남자는 당시 프랑스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곳은 말 그대로 프랑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고풍스러움이 도시 곳곳에서 묻어났다. 하나하나의 건축물마다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었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나 다니는 길거리에 널려있었다.


내가 이렇게 유럽의 건축물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건축물을 싫어해서다. 물론 지금의 건축물에 한해서다. 우리나라의 거리를 걷다보면 콘크리트로 된 창살이 달린 감옥을 빙빙 도는 기분이다. 콘크리트로 떡칠을 해놓은 상자들은 내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는다그곳은 단지 길일뿐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과거를 얻을 수 있는 흔적은 이미 소멸해버리고 없었다.


건축물에는 누군가의 역사가 스며있다


국민학교를 갓 들어갔을 때였나. 가족끼리 서울에 간적이 있었다. 옛 기억을 잘 잊어버리는 나인데도 그 기억은 또렷하다. 지금은 KTX를 타고 세 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다섯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더군다나 표가 없어 입석으로 열차를 탔던 터라 꽤나 고생했던 걸로 기억한다. 서울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자 꽤 놀랐던 느낌이 있다. 어린 나에게 서울은 얼마나 큰 곳이었을까. 그때의 서울역은 어린 내게 꽤 인상적이었다.


최근 서울에 갈 일이 있어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도착했지만 어렸을 때의 그런 감흥은 없었다. 옛 서울역보다 커졌고 편리해진 지금의 서울역은 단지 기차역일 뿐 '나의 서울역'은 아니었다. 군인이었을 때 수없이 서울역을 드나들었어도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역을 많이 오고갔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옛 서울역에 간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순간 어릴적 기억이 떠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옛 서울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옛 서울역은 이제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은 잃었지만, 하나의 박물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뒷걸음질을 쳐 옛 서울역의 모습이 다 보이는 곳에 멈췄다. 순간 어릴 적 서울역에 왔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알랭 드 보통은 행복의 건축에서 어떤 귀중한 것을 잊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깨닫는 순간 마치 우리의 기억들을 눌러놓는 서진(書鎭)처럼 어떤 구조물을 세우고 싶은 소망이 생긴다고 적었다. 옛 서울역은 내가 세운 것은 아니지만, 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소프트웨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옛 서울역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나 외에도 이 건축물은 수많은 사람의 기억들을 들춰낼 것이다. 어떤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접속하는지에 따라 다른 역사를 보여줄 것이다. 옛 서울역이 1925년에 지어졌으니 지금 87년 동안의 역사를 저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주변의 건축물은 무엇을 저장하고 있을까. 2003년에 신축된 서울역은 고작 10년의 역사를 담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기술이 발명되면 아마 재건축할지도 모른다. 내가 우리나라 건축물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 그 건축물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을 무시하는 것 말이다.


내가 유럽의 건축물을 좋아하는 것은 미적 취향이라기보다는 그 건축물에 담긴 역사성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글을 쓰듯이 집을 짓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물은 그것이 가진 기능을 다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마 프랑스인들은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프랑스의 역사를 생각할 것이다. 바스티유 광장을 지나며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릴 것이고, 에투알 개선문을 보며 나폴레옹 시대의 옛 영광을 느낄 것이다. 또한 주변의 옛 건축물을 보며 과거의 인물들을 생각할 것이다. 빛바랜 외벽과 문에 난 생채기 옛 사람들의 낙서 등은 건축물의 흠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이며 그들이 남긴 메세지다. 건축물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새 것만을 찾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우리나라는 낡은 것이라면 부수고 새로 짓기를 원한다. 그것은 건축물을 단지 기능적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담은 건축물은 높은 빌딩에 가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이상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거리를 거닐며 건축물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아쉽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어떤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수십 일도 걸리지 않아 완성되는 건축물에서 뭘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가 역사에 둔감한 것은 아마 이런 것 때문이지 않을까.


폭발물을 설치해 무너뜨리거나 중장비를 동원해 건축물 깨뜨리기 시작할 때 과거의 것들은 소멸한다. 그 건축물이 무너지는 광경은 오래전에 떠난 누군가가 돌아왔을 때 느낄지도 모르는, 기억 한 뭉텅이를 도려내는 아픔일 것이다. 옛 기억을 증언해줄 수 있는 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더 이상 그때를 떠올리게 해줄 장소가 없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이제 내가 옛 서울역에서 멈춰 묻어둔 기억을 꺼냈던 것처럼, 사람들이 잠시 머물러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의 저장소가 더 이상 사라지지 않기를, 그것을 바랄 뿐이다.



책 정보


제목 - 행복의 건축

지은이 - 알랭 드 보통(프랑스)

옮긴이 - 정영목

출판사 - 청미래

출간일 - 2011년 8월 10일

원제 - The Architecture of Happiness (2006년)




Comments

  1. BlogIcon Hansik's Drink 2014.02.02 15:05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
    웃음 가득한 하루를 보내세요~

  2. BlogIcon 어듀이트 2014.02.02 15:5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좋은글 너무 잘 보고 간답니다~
    행복하고 즐건 하루 보내세요`

  3. BlogIcon 노지 2014.02.02 22:50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그래도 최근에는 과거의 구조물을 현대의 장식에 이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하더군요.
    역시 건축이라는 분야에서도 구와 신의 조합이 좋을 듯 싶어요 ㅎ

    • BlogIcon 서흔(書痕) 2014.02.03 22:23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옛 것을 홀대하는 문화가 없어져야 우리나라에 문화란 것이 제대로 정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직까지 옛 것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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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재미없어

 

요즘 주변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 교육부에서 한국사를 필수로 하겠다는 이야기도 하고, 이에 따라 한국사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가치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게 재미있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 재미없다는 말이 나온다.

 

역사를 아는 것이 재미없는 이유는 시간 순, 사건 순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사회문화적인 역사보다 정치적 역사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의 흐름이다.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하지 않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단절된 사건으로만 배운다면 당연히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역사에 대해 이야기로 배우면 어떨까.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흥미와 재미를 주는 힘이 있다. 한 인물에 대한,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이야기 속에 나타난 역사를 간접적으로 배운다면 그 지루함은 예전보다 덜 할 것이다.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재미있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책 중 하나다.

 




명화를 통해 역사를 알다

 

과거에는 사진기가 없어 눈으로 당시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과거를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시대의 화가가 남긴 그림뿐이다. 그렇다면 그림을 통해서 역사를 배운다면 어떤 사실감이 더해질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착안한 것이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림 속의 인물들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럼의 주인공이 된 데는 아무래도 사연이 있었을 테니까요. 가령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이나 왕비, 혹은 위대한 장군이나 미인들은 그림 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유명한 인물들이죠. 이런 이야기를 아이에게 들려주다 보니 꽤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사실과 많은 인문 지식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배울 수 있어서 좋았고요. 그림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곧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였으니까요.”

- 머리말 중에서

 

저자의 말처럼 그림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곧 살아있는 역사다. 또한 그림은 그 그림에 얽힌 역사를 배우는 사람에게 사실감을 더해준다. 과거의 역사를 글로만 배운다는 것은 따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림 속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접하면 기억하기도 쉽고, 그 역사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다시 전하기도 쉽다.

 




역사를 재밌게 공부할 수 있는 자료


이 책에 대해 하나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문체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전달해주듯 구어체로 되어있기 때문에 나 같은 성인이라면 글로 읽었을 때 조금의 불편함이 느껴질 수도 있다. 저자가 이 책의 독자를 청소년으로 정해 글을 쓴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달해주는 식의 문체보다는 존댓말을 썼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 있는 것은 역사를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자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다. 학교에서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속에 있는 그림이 나온 시대를 가르칠 때 이 책을 예로 든다면 좋은 수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역사를 연대기 중심, 사건 중심, 정치 중심으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이야기 중심으로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다면 모두가 역사를 재미있어 할 것이다



PS. 책을 보내주신 예문당 출판사에서 수세미를 보내주셨어요. 그 정성에 감복해 감사의 말을 남깁니다. 책과 메모, 그리고 수세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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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예문당 2013.12.30 05:2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서평 감사드립니다.
    이 책은 청소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 그러지 않아도 성인 대상으로 만들어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네요.

  2.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3.12.30 07:34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청소년들에게는 좋겠는데요.. 역사가 참 어렵다고만 느끼게 하는 책들이 많아서..더더욱 괜찮을듯하네요
    저두 호기심이 팍팍 생기는걸요ㅎㅎ

  3. BlogIcon 오렌지수박 2013.12.30 07:56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명화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인 대상으로도 있다니 그것도 궁금해지네요.

  4. 하나비 2013.12.31 08:59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반갑습니다
    좋은글속에 감사히 머물러갑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새해도 행운 가득한 날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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