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풍경을 목도하는 것

[독서에세이] <보통의 존재>




길은 풍경이고 풍경은 우리에게 생각과 느낌을 준다. 길을 걸으며 흐르는 풍경을 목도하는 것이 바로 산책이다. (중략)오늘도 산책을 나간다. 오늘 나의 산책은 어떤 풍경들이 장식하고, 나는 그것을 보며 어떤 느낌과 생각들을 갖게 될까.이제 거리로 나간다. 그리고 나 또한 풍경의 일부가 된다.”

ㅡ 『보통의 존재 중에서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무얼 하다보면 갑갑함을 느낀다. 그 공간이 가장 안락하다는 집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답답함을 견디게 하는 항체가 없는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에 쉽게 감염된다. 특히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이론서들을 읽고 있을 때면 집중은 쉽게 흐트러진다. 엉덩이의 들썩거림을 결국 참지 못하고 나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만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 군락에서 벗어나 강가에 닿았다. 나는 반바지와 슬리퍼를 신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막이를 걸쳐 춥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원함이 느껴졌다. 옷 입은 나와는 달리 주변의 것들은 조금 앙상했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10월의 코스모스도 이제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저녁 여섯 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벌써 어둑하다. 조금씩 내려앉는 어둠 때문에 고요히 흐르는 강물은 약간 처연해 보인다. 나는 강물 옆 둔덕에 서서 그 모습을 감상했다.


일상에서 나는 딱히 자연에 집중할 시간이 없었다. 주변은 항상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하고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가며 잠시간의 상상도 방해했다.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은 나의 생각을 4인치의 조그만 공간에 가뒀다. 학교나 다른 약속장소에 갈 때면 스마트폰은 나를 순간이동 시켰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으니 말이다. 나와 자연의 관계를 막는 방해꾼은 항상 내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나에게 산책은 사랑의 도피였다.


어둠은 금방 내 몸을 감쌌다. 나는 어스름 때부터 여명이 오를 때까지, 어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상태를 사랑한다. 밤에는 누구나 감성적으로 변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낮 동안 이성적으로 살아온 삶이 벅차, 밤에 자연으로 달려가 감성적인 기운을 채우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나는 주로 늦은 시간에 산책을 나선다. 나는 둔덕 위에 정돈돼 있는 산책로를 떠나 조금 더 가까이 강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강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산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목적을 두지 않는 것이다. 다이어트를 한다거나, 어떤 고민에 대해 생각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산책이 아니다. 산책은 아무런 의미 없이 걷는 것이다. 그냥 정처 없이 걷는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걸었던 대로, 새로운 길이 나오면 그 길로 계속 걸었다. 밤이 가진 어떤 감성적 기운이 나에게 모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느낌을 만끽하며 계속해서 걸었다.


그 때 내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주의를 끄는 것은 이제 주변의 풍경밖에 없었다. 흐르는 강물, 조깅하는 한 여인, 바람에 부대끼는 갈대, 물 위를 걷는 왜가리인지 백로인지 모를 새, 다리 밑 평상 등 풍경은 끝없이 펼쳐졌다. 그리고 내가 지나갈 때마다 그 풍경들은 내 뒤로 흘러 지나갔다. “길을 걸으며 흐르는 풍경을 목도했다.


내가 목도한 풍경은 내 내면으로 들어와 상념이 된다. 그것은 내 속에 있던 것들과 섞여 새로운 것을 만들기도 하고,서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내가 그저 걸어가는 것이, 나도 모르게 창조의 순간을 만들고 있었다. 산책을 하고 들어오면 끙끙 앓고 있던 문제가 풀리고, 턱하고 걸리던 문장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썩 들어맞는다.


산책의 즐거움에 빠져 있다 퍼뜩 정신을 차리면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분명 풍경이 있지만 산책과는 다르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은 힘들다. 스스로 답답함을 자처하는 모양새다. 그래서 다음 산책을 기대한다. 다음 나의 산책은 어떤 풍경이 장식하고, 나는 그것을 보며 어떤 느낌과 생각들을 갖게 될까. 그것들은 또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까.



책 정보



제목 - 보통의 존재

지은이 - 이석원

출판사 - 도서출판 달

출간일 - 2009년 11월 14일




Comments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4.02.03 14:53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산책은..자연과 나..그 둘이 만났을때 비로소...가능한듯해요...제생각에는요..
    맘도 커지고..포근해지고...뭔가를 서로가 대화를 하듯...마냥 편해지는곳...그래서 자연과 내가 한몸이 되어지는..
    암튼.. 산책을 맘놓고 하기에는 팍팍하기만 한 곳에서 사는지라... 훅 ...산에 가고싶어지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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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에 글을 쓰려고 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생각이라기보다는 사진을 찾는 일이다. 아이폰 속에 있는 일상 사진을 뒤지다가 쓸만한 것이 없어, 예전에 찍었던 사진첩을 뒤적거렸다. 8월 11일 저녁, 양산천 주변을 걷다가 들었던 생각들과 가장 어울리는 사진을 찾다보니, 기차가 철도를 타고 역으로 들어오는 사진이 눈에 보였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모습은 경이롭다. 예고한 시간과 다를 수는 있지만 저 끝까지 펼쳐진 철도 위를 변함없이 달리는 모습은, 순간순간마다 변하는 나와 비교하면 분명 경이로운 일이다. 그것은 자연과 닮았다. 요즘은 환경파괴로 인한 것인지 뚜렷하지는 않지만 매년 때에 맞춰 돌아오는 사계절과 항상 산책을 할 때 걷는 양산천 둔치의 모습은 매일 변함없는 열차의 움직임처럼, 매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여름 중에서도 가장 더울 때라 집 밖으로 잘 나가진 않지만 집에 있기가 지겨울 때면 저녁 늦은 시간을 골라 주변을 걷고는 한다. 위에서 언급한 양산천 둔치를 누비고 다닌다. 매번 같은 길을 걷지만 그렇게 지겹지는 않다. 음악을 들으면서 걷기도 하고, 아니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팟캐스트를 즐겨듣기도 한다. 다른 것에 집중을 하다보면 걷는 것이 그리 지겨운 일은 아니다. 8월 11일, 오늘도 한참을 집에 있다, 몸이 근질거려 아이폰과 이어폰을 들고 집을 나섰다. 걸을 때 들을만한 팟캐스트 방송을 아껴두고 있던 터라, 그것을 들으며 후텁지근한 거리를 걸었다. 팟캐스트 방송이 끝날 무렵, 절로 경탄이 터지는 말을 들었다. 



Q.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했을 때, 정말 제가 그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일까요?


A. 어떤 인간이 지은 죄를 용서하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지요.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말할 때 그 용서는, 그 사람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듣고 있던 팟캐스트 방송에서 이런 문답이 나왔다. 최근 무한도전에도 나온 적이 있었던 정신과 의사 김현철 씨가 강의가 끝난 후 질의응답 시간에서 질문자와 나눈 대화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절로 입에서 경탄의 소리가 나왔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서 누군가의 죄를 용서했다고 하지만 그 죄에 대한 앙금과 상처는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것이 그것에 대한 기억이었고, 그것을 행한 사람에 대한 분노는 그 기억 때문에 다시 생기곤 했다. 이런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나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 또한 많을 것이다. 모두 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용서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을 때 뿐일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 또한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죄는 미뭐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일어난 죄를 징치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없앨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존재한다.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용서는 필연적인 것이 아닐까.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주인공 장혜성의 어머니 어춘심 여사가 장혜성에게 남긴 유언이 갑자기 떠오른다.



"사람 미워하는 데 니 인생을 쓰지마라. 칭찬하면서, 행복하면서 살기도 부족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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