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터라 종종 서점엘 들른다. 한꺼번에 여러 권을 주문하는 버릇이 있어 책을 구입할 때는 주로 인터넷서점을 이용하지만, 집에서 깜빡하고 책을 빠뜨리고 오거나 당장 읽고 싶은 책이 생길 때는 일부러 시간을 내 서점엘 들른다. 서점에 들어서면 광활하게 진열돼 있는 책의 바다가 내 마음을 상쾌하게 만든다.

 

인문사회 관련 책에 관심이 있어 그런지 발걸음은 자동적으로 인문사회 쪽 진열대로 향한다. 진열대 위에 누워있는 책들을 이리저리 훑다보면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많이 띈다. , 생각, 희망, 이미지, 관찰, 광고, 엄마 등등. 인문학이 붙지 않은 제목을 찾기 힘들 정도다. 서점의 사방팔방이 인문학으로 가득하다.

 

제목에 많이 쓰인다는 건 그만큼 인문학이란 단어가 판매량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마케팅 수단으로써의 인문학이 남발될수록 인문학 본연의 의미는 점점 퇴색되고 만다. 이원석 작가는 <인문학 페티시즘>이란 책을 통해 인문학 아닌 인문학이 판치는 세태를 비판한다.


<인문학 페티시즘>, 책표지 ⓒ필로소픽

 

인문학 페티시즘

 

지금 한국의 인문학적 상황은 어떠한가? 실로 활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에나 인문학이 넘실대고, 누구라도 인문교양을 주목한다. 당장 사회의 음지에서는 인문고전을 손에 들고 숱한 독서 멘토, 인문 멘토들이 찾아간다. (중략) 마치 인문학이 이제 한반도를 점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9)

 

마치 인문학이 한반도를 점거하고 있는 듯하다며 약간의 과장을 섞인 했지만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다. 실제로 인문학을 표방하지만, 인문학보다는 시류에 편승해 오로지 판매만을 목적으로 하는 수준 이하의 책들이 출판시장을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진짜인문학은 진짜라는 수사를 붙여야할 정도로 더럽혀졌다.

 

저자는 이러한 도구 혹은 장식이 되어버린 인문학에 대한 열광(18)”을 가리켜 인문학 페티시즘이라고 명명한다. 페티시즘은 물신 숭배라는 뜻으로 특정 사물에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그것을 숭배하는 일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를 차용해 인문학에 신적인 속성을 부여하고 숭배하며, 인문학이 자기계발의 도구가 된 현실을 명쾌하게 짚어낸다.


인문학 시장의 아이돌 강신주

 

"강신주는 전통적 철학자와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기계발 강사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하고 있다. (중략) 사실 지금 그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철학적 상담이라기보다 철학적 자기계발이 아닐까?"(45)

 

<인문학 페티시즘>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인 강신주를 소위 저격하고 있어서였다. 돌직구 철학자로 불리는 강신주는 책을 냈다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요컨대 강신주 자체가 베스트셀러인 작가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모자라서 강연을 못할 정도로 전국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는 강연 부자다. 철학자면서 대중성까지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성공했다고 해서 마냥 강신주의 방식을 상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신주의 책과 강신주가 출연하는 팟캐스트 등을 즐겨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답이라고 판단한 바를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내리찍는 화법에 질려 등을 돌렸다. 철학은 정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를 성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여러 갈래의 길을 터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가지 길을 정해 그곳으로 가라고 등 떠미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강신주는 일종의 도깨비방망이다. 돌직구로 그것을 내리치면 정답이 툭 하고 튀어나온다. 반면 자기성찰은 상당한 노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의지를 동원해야 하는 능동적인 행위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어릴 때부터 수동적인 생활을 강요당해왔다. ‘이렇게 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정답지를 받아 외우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강신주가 내리치는 도깨비방망이에 환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돈벌이로 전락한 인문학

 

분명 자기계발서인데도 겉에 인문학을 두르고 있는 책이 있다. 저자는 인문학으로 둔갑한 자기계발서를 쓴 대표적인 인물로 이지성을 꼽는다. 이지성은 ‘R=VD’라는 공식을 설파한 책 <꿈꾸는 다락방>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그런데 생생하게 꿈꾸면 이뤄진다는 신비주의적 내용을 다루던 이지성은 급작스럽게 종목을 인문고전으로 바꾼다. 인문고전을 다룬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인문고전과 성공학을 교모하게 결합한 이 책은 소위 대박을 쳤다. 시류를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야 할까. 최근에는 <생각하는 인문학>이란 책을 냈다. 인문학이 범람하는 현 세태를 정확하게 읽었는지 제목에 인문학을 박아놓았다. 이 책 역시 현재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자기계발 작가들이 생존과 성공의 수단으로 인문학을 활용하는 현실은 실로 개탄스럽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인문학이며, 그들이 참된 인문학도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보다 이렇게 인문학을 활용해서 정말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지는 더욱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반짝인다고 모두 금은 아니다.”(127)

 

이 같은 모습은 인문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밀접한 독서와 글쓰기 쪽에서도 발견된다. 몇 년 안에 수백수천 권의 책을 읽기만 하면 성공한다거나, 자신에게 글쓰기를 배우면 베스트셀러 작가로 떼돈을 벌 수 있다고 속삭이는 책들이 난무한다. 인문학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자기계발서가 호시탐탐 독자의 지갑을 노리고 있다.

 

인문학의 본령을 향해

 

문학평론가 김현은 <한국문학의 위상>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질문에 답한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고 말이다.

 

김현의 말을 풀이하자면 이렇다. 문학은 쓸모없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이 욕망하는 대상(단적인 예로 돈을 들 수 있다.)은 그 대상을 욕망하면 할수록 인간을 억압한다. 쓸모에서 자유로운 문학은 인간이 욕망하는 대상이 도리어 인간을 억압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의 본령도 여기에 있다. 인문학이 인문학이 아닌 시대다. 다시 한 번 김현의 답을 곱씹을 때다.

 

PS.

저자는 <거대한 사기극>이란 책으로 자기계발서가 횡행하는 현 사회를 제대로 꼬집었다. <인문학 페티시즘> 역시 비판할 만한 현 세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시종일관 밀어붙이는 투의 문체, 매끄럽지 못한 문장, 무성의한 편집은 책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글의 신뢰성까지 무너뜨린다. <거대한 사기극>에서 보여준 깊이와 통찰이 <인문학 페티시즘>에서는 보이지 않아 아쉽다. 이를 본문에 남기기엔 저자의 본의를 해칠 것 같아 글 말미에 남긴다.


 

 

책 정보(책 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인문학 페티시즘

  글쓴이 - 이원석

  출판사 - 필로소픽

  출간일 - 2015년 3월 10일

 

 

 


Comments

  1. 2015.08.04 16:39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5.08.06 22:27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오..인문학..참 많이 이야기 되기는 하는데.. 제가 긍정하는건 '사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여요. 자본주의사회에서 그 모든것이 다 상품이 되는 세상이니..인문학이라고 뭐 다르겠나 싶어요. 아마, 인문학뿐만아니라 이사회의 모든것이 '돈'에서 자유롭고, '돈'을 섬기지않으면서 오로지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쓰여지는 것이 있다면(존재한다면), 그것은 유일무이한 '희망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무튼, 강신주 책은 아주 좋게 읽었는데.. 강연방식은 아닌가보네요. 질려버렸다는 분이 계시긴했어요. 제가 참 의아해했는데..
    책에서는 보여지지않는 그런태도가 존재하는 게..정말 놀랍네요. 그건.. 그간 읽었던 책에 대해서도 갑자기 의문이 생기네..ㅠㅠ
    물론, 얼마전 무슨 그림을 놓구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꼭 보고 위로받았으면 한다고 아침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할때..제가 너무 놀랬거든요.
    아니.. 비정규직노동자가 '그림'을 안봐서 위로를 못받는게 아니잖아요? .. 제가 참 갸우뚱..했었던..그런 사건이였는데..

    아무튼.. 책이 다양한 지적을 했는데..상당히 거칠었나보군요. 아무튼.. '돈'이 신으로 우리에게 존재하고 신으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가지게 하는 사회에 사는한.. 그 범위를 뛰어넘으며 혹은 거부하며 사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힘들고 고단한 삶이겠지만..어찌보면 가장 행복한 것을 찾아 가는 사람일꺼여요.

    우아~ 말 길게썼당..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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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은 미세한 단세포 생활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우리가 세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것은 불쾌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자동반사적이다. 다시 말하면 세균이라는 단어에는 미세한 단세포 생활체라는 의미 대신 더럽고, 꼬물거리고, 불결한 생물체라는 의미가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균이라고 해서 모두 다 해로운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우리의 신체에 살면서 우리의 몸 대신 해로운 세균을 저지하는 좋은 세균도 존재한다. 제시카 스나이더 색스가 쓴 <좋은 균 나쁜 균>이란 책은 세균이라는 단어에 기생하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떨쳐내려는 시도다. 책은 각종 사례와 전문적인 정보를 독자에게 제시하면서 세균에서 느끼는 감정 대신 세균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좋은 균 나쁜 균>, 책표지 ⓒ글항아리

 

세균은 정말 나쁜가?



특정 미생물이 특정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코흐와 파스퇴르가 증명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신세대 의학 연구자들은 세균 박멸을 목표로 세균계와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세균에 대한 파스퇴르의 부차적 관점을 간과했다. 파스퇴르는 모든 세균이 해로운 것은 아니며,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세균이 이로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49~50)”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아토피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의 아토피 피부염 때문에 고생하는 부모를 많이 볼 수 있다. 아토피 피부염에 관한 여러 진단과 처방이 난무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처방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저자는 아토피 피부염, 건초열, 천식 등의 유행이 일반적인 감기에서 홍역, 볼거리, 풍진에 이르기까지 유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바이러스성 질환이 줄어든 것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했다(122)”고 설명한다.

 

저자의 주장은 우리 신체에 내재한 면역계가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의 수단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필자에게 홍역, 볼거리, 수두 등의 바이러스성 질환은 어린 시절 당연히 겪어야 하는 관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겪는 것인 줄만 알았던 이러한 바이러스성 질환이 미성숙한 면역계가 탄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생이나 청결이 강조되고, 아이들의 놀이터에 흙 대신 우레탄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세균과의 접촉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세균학자 시어도어 로즈버리의 주장을 동원해 이러한 시도가 위선임을 폭로한다


균과 오물이 항상 우리의 적이라는 통념은 해롭고 낭비적이다. (중략)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고유의 이 오밀조밀 잘 짜인 사회를 이루고 있으면, 이런 균보다 적응을 잘 못해서 병을 일으키는 다른 균의 침입을 막는 가장 튼튼한 방벽이 된다.(59)

 

감염과 세균 정착

 

저자는 면역학자인 그레이엄 룩의 주장을 통해 인체의 정상적인 미생물상과 물과 음식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오는 주위의 세균을 기준으로 질병의 원인이 되는 감염과 무해한 세균 정착을 구분(152)”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세균하면 떠오르는 것은 우리 신체에 들어와 위해를 가하는 감염이었다. 감염만을 염두에 두고 세균을 박멸한다면 세균 정착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룩이 주장하는 세균 정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면역계가 오작동할 수밖에 없다. 면역계가 오작동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몸을 이루는 건강한 세포까지 공격한다. “마치 어떤 안전 정지선이 사라진 것처럼 면역계가 민감하게 반응하고 친구인지 적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116)”

 

세균과 인간의 공존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우리 몸에서 세균을 박멸하거나 세균과의 접촉을 차단하면 면역계의 균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주장이 균 이론자체가 가져다준 이로운 점을 배제하거나 공중위생과 항생제로 미생물과의 자연스러운관계가 파괴되기 이전 시대의 인류가 훨씬 나았다는 암시를 내포(229)”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균과 인간의 공존이다. 저자는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조슈아 레더버그의 주장을 빌어 독자들에게 외친다


만약 인간을 단순히 하나의 개체 이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지평은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인간은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보다 훨씬 많은 미생물을 포함하는 초개체입니다.(356)”

 

우리의 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더럽고 불결하게 여기는 세균이라는 아주 작은 존재다. 세균과 인간의 공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세균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건강과 생존을 지키는 열쇠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세균계가 쥐고 있을 것이다.(357)”



 

책 정보(책 표지를 클릭하세요)


  

  책제목 - 좋은균 나쁜균

  글쓴이 - 제시카 스나이더 색스

  옮긴이 - 김정은

  출판사 - 글항아리

  출간일 - 2012년 7월

 

    



Comments

  1. BlogIcon 정세균 2016.01.22 11:03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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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중략)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133~134)

 

인류의 진보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비롯됐다. 과거 프랑스 대혁명이나 68혁명 등에서부터 현재 페미니즘 운동이나 동성애 합법화 운동 등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희망이 있는 사회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현재는 항상 불행할 뿐이다.

 

생존하기가 한 해의 목표인 시대다. 갈수록 삶은 팍팍해진다.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자문해보지만 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동력은 희망이다. 하지만 도처는 절망으로 점철돼 있다. 미래에도 삶이 더 낫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희망 대신 행복을 찾는다.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절망의 바다에서 더 나은 삶이라는 희망찾기를 멈추고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선택한 일본 젊은이들을 다룬 연구서다. 저자는 독자에게 불행 없음이 어떻게 행복 추구로 귀결되는지 보여준다.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책표지 ⓒ민음사

 

불행한 사회, 행복한 젊은이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연구는 일본 청년을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우리나라 청년에게도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전철(前轍)을 그대로 밟고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일본의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과 아주 유사한 것은 공공연하다. 이러한 한일 간의 유사성은 일본 사회현상을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 근거가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및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의 회생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혁명 역시 그리 원하지 않는다.(34)

 

저자는 일본 청년이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분명 사회는 절망이 가득한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인간은 현재가 불행 혹은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보를 위해 투쟁해왔다. 방법은 다양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일 수도, 정치적인 혁명일 수도 있었다.

 

방법이 무엇이든 목적은 같았다. 더 나은 삶이라는 지향은 인류의 진보로 이끌었다. 하지만 현재 일본 청년은 진보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관심을 둘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개인의 생존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보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관련 교육이 부재한 것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한일 청년의 삶은 생존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생존의 문제에서 타인의 삶이란 논외일 수밖에 없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 자기계발을 하거나 주변 사람을 돌보는 게 남는 장사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편해 보인다. 사회적 연대보다 개인의 행복 추구가 더 나은 삶이라 믿는다.

 

경험의 부재, 행복의 맹신

 

트위터나 소셜 미디어가 사회를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개인의 승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쉬운 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기능은 사회 변혁과 반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트위터에 마치 사회의식이 있는 것처럼 적당히 글을 올려 팔로워들의 칭찬을 유도하고, 많은 수의 리트윗에 만족한다.(298~299)

 

혹자는 각종 커뮤니티나 SNS에 난무하는, 진보성 짙은 글의 향연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반문할지도 모른다. 온라인 공간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지금 쓰고 있는 리뷰조차도 같은 처지다. 행동하지 않는 진보가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 청년은 더 이상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덧없는 희망을 좇기보다는 눈앞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하면 지금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분명 행복한 것이 아님에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의 영역에 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다. 우리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보다 스스로 인지부조화의 길로 걸어들어 간 것이다.

 

기성세대는 아마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성세대와 청년은 분명 다르다. 경험의 차이다. 현재 기성세대는 인류의 진보를 목격한 세대다. 그들은 청년 시절 진보의 흐름에 참여했다.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체험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세대는 아니다. 진보가 아니라 인류의 절망을 목격한 것이다.

 

진보가 불가능한 시대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능동적으로 현재에 순응하는 것이다. 현재에서 아주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어떻게든 행복할 지점을 찾아내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프리터족이나 니트족보다 더한 종족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절망적인 사회, 불행한 청년

 

이제껏 일본은 경제 성장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려왔는데, 돌연 경제 성장이 멈춰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모두가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것이다.(307)

 

사실 일본의 사례는 양반이다. 최저시급도 높을뿐더러 여러 복지제도도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다. 일본 청년은 아르바이트만 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니다. 일본 청년은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나라 청년은 불가능하다.

 

아직 우리나라 청년은 아비규환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취업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불행은 잠시뿐이라 믿으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는 점점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

 

끝은 정해져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정해진 끝으로 달려갈 뿐이다. 행복한 청년을 생산하는 사회구조를 깨뜨려야 모두가 살 수 있다. 8년 전 우석훈과 박권일이 <88만원 세대>에서 짱돌을 들어라고 외친 것처럼, 이제 정말 저항과 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모두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과연 우리나라 청년은 생존할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제목 -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글쓴이 - 후루이치 노리토시

  옮긴이 - 이언숙

  출판사 - 민음사

  출간일 - 2014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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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8 15:49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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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바질을 곁들여 가지로 감싸 오븐에 구운 모짜렐라 치즈. 이는 '엘본 더 테이블'의 메뉴 중 하나다. 엘본 더 테이블은 '허셰프'라는 캐릭터로 다방면에서 인기몰이 중인 최현석 셰프가 총괄 셰프로 있는 곳이다. 이곳의 메뉴 대부분이 비슷했다. 서울에 볼일이 있던 차에, 들러볼까 하고 포털사이트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던 중이었다. 이때 내가 떠올린 생각은 '길다'였다.

 

김치볶음밥, 짜장면, 후라이드 치킨 등 배달음식이 친숙한 나는, 고급 레스토랑의 기다란 메뉴에서 왜인지 모를 위압감을 느낀다. 뒤이어 메뉴가 꽤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메뉴를 본 내 감상은 여기서 끝난다.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는 이렇게 생겼네'하고 금방 넘길 것이다. 이런 나와 달리 <음식의 언어>의 저자인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이를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스탠퍼드대학의 언어학 교수인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계량언어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컴퓨터공학자다. 그는 음식의 언어에 주목한다. 내가 그냥 지나친 메뉴에서 그는 "온갖 종류의 잠재적인 언어학적 힌트(25)"를 발견한다. 예컨대 음식을 묘사하는 글자 하나가 더 늘어날수록 해당 음식이 비싸진다는 통계 같은 것들 말이다.


<음식의 언어>, 책표지 ⓒ어크로스

 

'구별 짓기'로 보는 음식의 언어



것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 피라미드, 진시황릉 등이 단적인 예다. 인간은 수많은 욕망을 품지만, 무엇보다 '타인보다 자신이 더 나음'을 드러내기 위한 욕망이 크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별 짓기'라 명명했다. 자본가는 이 부분을 파고 든다.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이 상품은 타인과 구별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음식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먹는 것에서도 구별 짓기를 욕망한다. 때문에 레스토랑의 메뉴에서부터 포테이토칩의 광고 문구까지, 욕망을 자극하는 언어가 난무한다. 요리와 포테이토칩을 공급하는 자본가는 언어를 통해 소비자가 제품을 손에 집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메뉴와 광고 문구에서 자본가의 의도를 도출해낸다.

 

레스토랑은 자신들이 주 고객으로 삼는 계층에 따라 사용하는 메뉴의 언어가 다르다. 값비싼 레스토랑은 강박적으로 재료의 출처를 밝히고, 우아하고 장황한 단어로 요리를 묘사한다. 또한 값싼 레스토랑에는 선택할 수 있는 요리 가짓수가 훨씬 많으며, 이에 반해 값비싼 레스토랑은 주방장 추천 메뉴가 더 많다.

 

값싼 칩: 우리 칩의 그 특별한 맛은 어디에서 올까? 그건 비밀이 아냐. 만든 방법 덕분이지!


값비싼 칩: 우리는 전적으로 천연 재료를 사용하며, 모든 내용물을 손으로 직접 추려 포장하고, 모든 준비 단계에서 칩을 테스트하여 품질과 맛을 보장한다.(214~215)

 

포테이토칩 광고 문구에서도 동일한 구조가 나타난다. 값싼 칩의 광고 문구에는 쉬운 단어와 간단한 문장이 쓰인다. 반면 값비싼 칩의 광고 문구는 정반대다. 카피라이터가 상위 계층에게는 복잡한 단어와 문장을 쓰는 편이 좋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자본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지를 반영한다(220)"는 사실을 말이다.

 

음식의 언어에서 발굴한 역사

 

"케첩, 시럽, 아스피크, 칠면조, 마카롱, 셔벗, 아락 같은 것들은 페르시아의 샤, 바그다드의 칼리프, 프로방스의 군주들, 뉴욕의 거부들이 먹던 고급 식사뿐 아니라 푸젠성 출신의 선원들, 이집트의 약사들, 멕시코의 수녀들, 포르투갈의 상인들, 시칠리아의 파스타 장인들, 애머스트의 시인들, 그리고 뉴욕의 제빵사들이 먹던 식사의 언어학적 화석이다."(346)

 

우리는 오래된 지층에서 발굴된 화석을 통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일부나마 엿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멸하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남은 언어도 옛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저자는 음식에 관련된 '언어학적 화석' 중에서 일부를 발굴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책에 등장하는 것은 피시앤드칩스, 케첩과 칵테일, 와인과 토스트, 칠면조 등이다. 지면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중에서 피시앤드칩스만 소개할까 한다.

 

저자는 우리가 영국의 대표요리라고 알고 있는 '피시앤드칩스'의 기원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가 도착한 곳은 6세기 중반의 사산조 페르시아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호스로 1세 아누시르반이다. 저자는 피시앤드칩스의 원형이 호스로 왕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인 '시크바즈'라고 지목한다. 시크바즈는 새콤달콤한 쇠고기 스튜라고 한다. 피시앤드칩스는 분명 생선과 감자를 튀겨낸 음식인데 말이다.

 

저자는 독자의 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크바즈가 어떻게 피시앤드칩스로 변모할 수 있었는지 추적한다. 호스로 왕의 시크바즈는 널리 퍼졌는데, 퍼지면서 각 지역에 맞게 전용(轉用)된다. 9세기 이슬람 선원은 시크바즈의 재료로 생선을 썼다. 이어 13세기 이집트에서는 생선을 밀가루에 묻혀 튀겼다. 14세기 지중해 항구에서는 생선 시크바즈의 이름을 에스카베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6세기 에스파냐의 페루 정복 당시 에스카베체가 전해졌는데, 이것이 페루 전통 재료와 접목해 세비체가 탄생한다. 17~18세기 경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쫓겨나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에 의해 에스카베체가 들어온다. 여기에다 19세기 중반 등장한 감자튀김이 추가돼 지금의 피시앤드칩스가 만들어졌다. 요컨대 피시앤드칩스는 수천 년에 걸친 문화적 합종연횡으로 탄생된 것이다.

 

음식의 언어에서 교훈을 얻다

 

저자는 단지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피시앤드칩스의 변천사에서 우리가 배울만한 교훈을 끄집어낸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 모두가 이민자라는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문화도 고립된 섬이 아니며, 문화와 민족과 종교 사이의 혼란스럽고 골치 아픈 경계에서 어떤 훌륭한 특성이 창조된다."(98)

 

문화에 있어 최고와 최초를 논한다는 것은 부질없으며,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발생하는 혼란에서 어떤 창조적인 특성이 꽃피운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피시앤드칩스에 관한 것만 언급했지만 저자는 책에 언급된 다른 음식에서도 해당 음식과 관련된 교훈을 매번 추출한다.

 

<음식의 언어>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저자가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성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선언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 저자는 음식의 언어가 주는 마지막 교훈인 '자비의 조리법'을 제안한다.

 

"우리 자신의 부족이나 민족의 언어적 습관과 요리 습관은 모든 부족과 민족에게 해당되는 습관이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언어와 문화는 깊은 공통성을, 우리를 인간이 되게끔 해주는 사회적·인지적 특징을 공유한다. 이런 사실들, 즉 차이에 대한 존중, 공유되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 등이 자비의 조리법에 들어가는 재료다. 그것이 음식의 언어가 주는 마지막 교훈이다." (347)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제목 - 음식의 언어

  글쓴이 - 댄 주래프스키

  옮긴이 - 김병화

  출판사 - 어크로스

  출간일 - 2015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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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4 17:31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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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 과()냐 그것이 문제로다

[서평] 히틀러의 철학자들

 


마르틴 하이데거, 카를 슈미트는 누구나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아주 유명한 독일 철학자다. 이 둘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나치 독일에 부역한 철학자라는 사실이다.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나치부역자들이었다니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은 <히틀러의 철학자들>이란 제목의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됐다. 이 책은 이본 셰라트라는 영국인 학자가 쓴 것으로, 나치 시대에 히틀러에게 동조했던 지식인이 아무런 내적 청산이 없었음에도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파헤치기 위해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한 후 다큐멘터리 기법을 활용해 정치와 철학의 빗나간 만남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천재적인 철학 바텐더 히틀러

 

홀로코스트라고 지칭되는 유대인 집단 학살은 제노사이드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자행된 이 재앙은 지금까지 회자되면서,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의 극단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반면교사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을 실행할 수 있었을까. 600만 명에 달하는 한 인종을 몰살시키겠다는 마음을 먹기 위해서는 살인에서 오는 죄책감을 초월할 수 있는 신념 체계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그것이 집단 학살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신념 체계에 대한 광신(狂信)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히틀러가 동원한 신념 체계는 바로 반유대주의였다. 반유대주의는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반유대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라는 굴레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다. 예수의 죽음에서 비롯된 반유대주의는 수천 년간 지속적으로 쌓여 있었는데, 히틀러가 그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구멍을 뚫어낸 것이다.

 

히틀러가 자신만의 반유대주의를 구성하게 된 것은 독일 바이에른 주에 있는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면서부터다. 히틀러는 시간만 넘치는 교도소 독방에서 독서에 매진했다. 거기서 다양한 독일 철학자들을 접했다. 지금까지도 추앙받는 여러 독일 철학자들, 예컨대 임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헤겔, 프리드리히 실러, 요한 피히테, 프리드리히 니체, 리하르트 바그너 등에게서 히틀러는 그들의 철학적 영감 대신 반유대주의의 영감을 얻었다.

 

극소수의 계몽된 유대인을 제외하면 대다수 유대인은 도덕적, 정치적으로 게르만인과 동등하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배제되어야 마땅하다.(임마누엘 칸트)”

 

나는 유대인들에게 시민의 권리를 부여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본다. 만약 그들의 머리를 잘라낸 다음 유대인적 사고가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새로운 머리를 갖다 붙인다면 그들에게도 시민의 권리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요한 피히테)”

 

유대인은 그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존해 있다.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 역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본질은 사라지고 단지 송장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게오르크 헤겔)”

 

히틀러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이 증명된 것 같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반유대주의 사상은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까지, 민족주의에서 과학까지 독일 사상의 모든 분야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본문 102)” 히틀러는 천재적인 바텐더 기질을 발휘해 독일 사상의 모든 문야 속에 스며들어 있는 반유대주의를 뽑아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라는 칵테일을 만들어냈다. 란츠베르크 교도소 수감시절의 왜곡된 독서가 만들어낸,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재앙을 일으킨 시작점이었다.

 

히틀러의 철학자들

 

히틀러가 바텐더로서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해 자신만의 반유대주의를 구축했다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독일인들에게 소위 먹히도록뒷받침한 철학자들이 있다. 바로 앞서 언급한 카를 슈미트와 마르틴 하이데거다. 저자는 슈미트와 하이데거를 각각 히틀러의 법률가, 히틀러의 슈퍼맨으로 칭한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때 히틀러 총통과 동료 투사들이 명예로운 나치의 표지 아래에서 했던 연설은 유대인과의 이념 투쟁에서 현재의 전투를 감동적이고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거짓말에서 독일 정신을 해방시켜야 합니다.”(카를 슈미트, 본문 153~154)

 

국가라는 실체를 보호하고 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힘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키십시오……. 오직 총통 한 사람만이 독일의 현실이며 독일의 오늘, 독일의 미래입니다. 그리고 독일의 법입니다……. 히틀러 만세!(마르틴 하이데거, 본문 181)

 

현재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의 대표주자로 알려져 있는 하이데거, 조르조 아감벤과 같이 현대에 인기 있는 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호명되고 있는 슈미트. 이들은 사실 나치에게 부역하고 히틀러를 미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홀로코스트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치에 부역했고,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당시 슈미트와 하이데거처럼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쿠르트 후버 등의 철학자를 언급하면서 이들을 히틀러의 적들이라고 표현한다. 슈미트와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하고도 처벌받지 않고 지금까지 위명을 떨치고 있는 것과 달리 히틀러의 적들은 불운한 삶을 살게 된다.

 

발터 벤야민은 유대인으로 히틀러의 나치 치하에서 나치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파리로 망명했다. 이후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스페인으로 다시 망명을 시도했지만 망명 도중 국경에서 나치의 추격에 버티지 못하고 자살한다.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한나 아렌트는 나치가 집권하자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나치가 패망하기 전까지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쿠르트 후버의 경우에는 독일 내에서 나치에 반하는 운동을 펼치다 죽기까지 한다.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와 나치에 반대한 철학자의 생애는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보인다. 절대적인 악을 추종했던 철학자는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과 달리 나치에 불복한 철학자는 자살하거나 죽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이런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일까.

 

공과(功過)의 딜레마

 

철학 분야에서는 많은 쟁점이 잠을 자고 있다. 가장 강렬하게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널리 보급된 사상 가운데 일부는 하이데거처럼 단 한 번도 유대인 대학살을 비난한 적이 없는 철학자들의 사상이다. 우리는 그들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는 그들이 쓴 언어의 맥락을 무시한 채 거리낌 없이 학생들에게 <존재와 시간>을 읽으라고 권하고 슈미트의 저작과 논리학자 프레게의 책을 읽으라고 권해야 하는가? (중략) 방금 한 질문들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본문 378~379)

 

저자가 <히틀러의 철학자들>과 같은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워야하는가 또는 나치의 생체실험을 통해 얻은 의술로 사람을 치료해야하는가 등과 같은 딜레마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도 이런 딜레마의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다.

 

박정희는 16여 년 동안 독재자로서 민주주의를 가장할 뿐 부정하고, 자신의 권력을 수호하려했다. 때문에 대통령이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유신을 단행하고, 계엄령과 긴급조치 등을 통해 국민들을 탄압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오에도 박정희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많다.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의 경제를 성장시켰다는 공()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대한민국 국민의 힘으로 이뤄낸 것임이 분명하지만, 당시 대통령이 박정희였기 때문에 박정희가 경제성장을 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이렇듯 공과 과가 공존하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 옹호하는 사람은 과를 공으로 덮으려고 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과로 공을 덮으려고 한다. 슈미트와 하이데거, 그리고 박정희 역시 이런 딜레마가 존재한다. 하지만 공으로 과를 덮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로 공을 덮을 수도 없다. 공과(功過)라는 것은 한 인물의 인생에서 배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와 하이데거가 나치 부역자라면(그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처벌받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들의 사상을 공부할 때 그들이 나치 부역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들의 사상을 반유대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박정희에 대해 배운다면 아무리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뤄냈더라도 그가 독재자였던 것을 알고 있으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인물의 인생은 공이나 과라는 한 단면으로 판단할 수 없다. 인생에 있어서 공과(功過)란 공존하는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정보



  
제목 - 히틀러의 철학자들

  지은이 - 이본 셰라트

  옮긴이 - 김민수

  출판사 - 여름언덕

  출간일 - 2014년 5월 31일

 



Comments

  1. BlogIcon 여강여호 2014.07.18 17:46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분명한 것은
    추앙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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