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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독서, 글쓰기/인문/사회

증언할 수 없는 증언자, 프리모 레비,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





홀로코스트는 나치가 자행한 유럽유대인의 절멸(이하 절멸)’을 뜻한다. 처음 이 단어를 접했을 때는 단지 절멸을 뜻하는 고유명사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본래 번제물이라는 뜻을 가진다. 번제물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양이라는 뜻이다. 과연 절멸이 신을 위한 번제물이었나. 지금에 와서야 이런 의문이 들었다. 조르조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홀로코스트를 무의미한 죽음을 정당화하려는, 즉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에 의미를 되돌려주려는 무의식적인 요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절멸의 증언자인 프리모 레비도 마찬가지였다.

 

아감벤과 레비의 말처럼 절멸에 의한 유대인의 죽음은 무가치한, 무의미한 죽음이었다. 무가치한 죽음을 목격하고 증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더군다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죽음이 육백 만에 달한다면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어떤 심경일까. 당시를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인간의 죽음이 그토록 무가치하다는 사실은, 그 시기에 관심을 가지게 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죽음의 수용소를 겪지 못한 자들은 증언자를 통해서만 그때를 구성할 수 있다. 증언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프리모 레비.

 

프리모 레비는 절멸의 당사자인 유대인의 충실한 대변자였다. 그는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와 나치가 벌인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증언하려 펜을 들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등 여러 책들과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참상을 낱낱이 증언했다. 그런데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가 돌연 아파트 3층 난간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렸다. 자살한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 대다수는 증언하는 것을 꺼렸다. 아마 그때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도 레비는 증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가 왜 돌연 자살한 것일까.

 


▲ 살아남은 자들 중 하나인 프리모 레비



증언할 수 없는 증언자

 

증언한다는 것은, 자신이 겪었던 것을 세상에 토해내는 작업이다. 증언한다는 것은, 증언하려고 하는 사건의 당사자여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죽었다면 어떻게 할까. 그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을 과연 증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사자들이 없는 증언에는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있다. 그것은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증언에는 죽은 자들이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공백 때문에, 어떤 상실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증언자나 침묵하는 자나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리라.

 

프리모 레비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증언자임에도 우리 생존자들은 진정한 증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증언조차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회상을 읽고 자신의 회상을 세월이 지나읽는 사이에 조금씩 희석하게 된 이상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증언의 공백에서 온 어떤 상실감 때문에 프리모 레비는 돌연 자살한 것이 아닐까.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하면서 처음 그 공백을 느끼고, 그것이 점점 그의 몸을 잠식해가는 느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증언의 공백이 레비의 몸을 집어삼켰을 때쯤 그는 아파트 3층 난간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내면의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 칼 아돌프 아이히만



인간에 대한 의문

 

과연 증언의 공백만이 그를 자살로 내몰았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를 경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것은 수용소를 경험했다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절멸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인가. 절멸이 인간적이라는 수사에 포함될 수 있는가. 절멸 이후 인간이라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간이라는 명제에 금이 간 시대에 그 균열을 메워보려 한 자였다. 그는 수용소에서 해방된 이후 줄곧 그러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독일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절멸이란 행위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모른 체 했다. 절멸에 대한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였음에도 말이다. 조해진의 단편 빛의 호위에는 이런 독일인을 본 레비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문장이 있다.

 

사람들이 노먼을 시대의 양심이니 유대인의 마지막 희망이니 하는 수식어로 포장하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런 거창한 수식어 뒤에 숨어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정의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뭐랄까, 나에겐 천진한 기만 같아 보였죠. 알려 했다면 알았을 것들을 모른 척해놓고 나중에야 자신은 몰랐으므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에 양심적으로 경악하던 그 수많은 비유대인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화가 나진 않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무기력해졌을 뿐이에요. 무기력한 환멸 같은 거, 그런 거였죠.”

 

무기력, 무기력한 환멸. 프리모 레비는 아마 이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에 양심적으로 경악하던 그 수만은 비유대인들을 목격하면서 그는 인간이란 것이 과연 인간인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절멸을 은폐하려는 독일 수정주의 학자들의 움직임은 그의 감정을 더 격화시켰을 것이다. 그의 돌연적 죽음은 절멸 이후 인간이라는 명제에 난 균열을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음을 폭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경



살아 있다는 수치

 

모두가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았다는 사실. 이것은 분명 안도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의 수용소라면 안도의 감정보다는 수치의 감정이 더 클 것이다.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나치에 일정한 도움을 줬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절멸에 동조했다는 수치로 바뀌게 된다. 남이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위로할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수치일 수밖에 없다.

 

프리모 레비는 너희는 타자를 대신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수치스러운가? 게다가 자신보다 마음이 넓고 섬세하며 유용하고 현명하며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절규하는 듯 했다. 또 그는 누구나가 그 형제들에게 카인이라고, 그것이 우리를 좀먹고 초조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레비는 살아남은 자들을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죽인 카인이라고 칭한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로지 수치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는 앞서 언급한 것들 외에 수많은 이유 때문에 스스로의 몸을 던졌을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살아남은 자들의 처절함에도 그와 같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는 이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망명 유대인들의 돌연한 죽음을 자기본위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누군가 죽으면 이제야 그 사람이 완전히 어깨의 짐을 벗었구나 하고 쾌활하게 생각하곤 했고, 결국에는 자신도 얼마나마 어깨의 짐을 벗을 수 있길 원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자살하고 만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글은 프리모 레비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자기본위적 죽음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는 자신이 빚진 자들의 무게를 그때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완수했다고 여긴 것일까.

 

증언하지 않는다면 공백조차 없다

 

죽은 자들은 증언할 수 없다.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도 증언을 그쳐야만 하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증언은 계속 되어야 한다. 증언하지 않는다면 공백조차 생기지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의 증언이 의미 있는 것은 죽은 자들이 남긴 공백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이 없다면 죽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증언 속 공백은 죽은 자들이 남긴 흔적이다.

 

나치의 친위대원은 죽음의 수용소의 수인들에게 너희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낄낄댔다고 한다. 이것이 증언이 필요한 이유다. 인간이라는 명제는 이미 균열되었다. 절멸은 다시 한 번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을 제시했다. 인간 아닌 인간적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증언은 계속되어야 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만이 죽은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증언의 공백을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