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독서, 글쓰기/문학/에세이

이카루스의 날개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비행공포>




비행(飛行)에 대한 공포. 그것은 어떤 공포일까. 단어 그대로 날 수 없다는, 고소공포증과 비슷한 공포일까. 아니면 세상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는, 세상이 주는 치명적 달콤함을 이길 수 없다는 그런 뜻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비행(非行)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억압적 상황에 대한 공포일까. 비행공포라는 제목만으로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는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가사와 육아를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동시에 남자에게 구속당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진 주인공 이사도라 화이트 윙의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인 이사도라의 삶 전체를 관통하면서, 남성중심사회 속의 여성과 혼란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비행공포를 주인공인 이사도라가 네 명의 남자를 길잡이로 삼아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싶다. 소설 속에서 이사도라는 항상 자신이 만나는 남성에게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몸짓에 불과하다. 이사도라 자신이 없는 결혼생활은 매번 결핍을 만들어냈고, 남편과는 항상 불화했다. 그래서 이사도라는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지퍼 터지는 섹스를 갈망했다.

 

그 욕망은 세 번째 남자인 베넷과 정신분석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났을 때 달아올랐다. 거기서 에이드리언을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이사도라는 자신이 환상으로만 생각했던 지퍼 터지는 섹스를 에이드리언과 경험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베넷과의 결혼이 주는 안정감을 던질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한 믿음이었다. 결국 이사도라는 베넷을 포기하고 에이드리언과 사랑의 여행을 떠난다.

 

이사도라는 에이드리언을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그것은 앞선 세 명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에이드리언을 자신의 존재가치로 삼는 것이었다. ‘자신이 없는 욕망은 끝내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부인과 자식을 만나기 위해 이사도라를 버리고 떠난다. 이사도라는 분노하지만 남은 것은 단지 자신 밖에는 없었다.

 

에이드리언을 쫓아 햄프스테드로 가지 않을 것이다. 자기파괴적인 열정 때문에 내 삶을 망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다. 내 안의 또다른 나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던지지 못하는 이사도라를 경멸한다. 그러나 이제 가식은 필요치 않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자기희생 다윈 이제 관심 없다. 로맨틱한 여주인공이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비행공포554

 

나는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이사도라는 자신이 지퍼 터지는 섹스를 했다고 믿었던 에이드리언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이제까지 자신이 가진 것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 바로 이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르트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실존이 조금은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사도라는 다시 베넷을 찾아 런던으로 떠난다. 그것은 이사도라에게 이전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이전의 사랑과 의존성이 사라진 상태, 그것은 아마 에이드리언에게 버림(?)받고 난 이후 호텔에서 이사도라 스스로 씻어낸 것이리라. “살아남는다는 건 자꾸만 다시 태어나는 걸 의미했다는 이사도라의 말처럼, 이사도라는 다시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사랑이 실망 외에 무엇을 주었던가? 아니면 내가 사랑에 잘못된 기대를 품었던가? 나는 남자 속에서 나 자신을 잃고 싶었고, 나 자신이기를 멈추고 싶었으며, 빌린 날개로 천국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이사도라 이카루스라고 불러주세요. 그러나 빌린 날개들은 내가 필요로 할 때 붙어 있어주질 않았다. 아무래도 내 날개를 길러야 할 것 같다.“

-비행공포555

 

베넷이 들어오면서 소설은 끝난다. 베넷이 들어온 이후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수도 있고,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또 이사도라의 비행(非行)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TV를 켤 수도 있다. 아마 베넷은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이사도라를 감싸는 날개를 봤을지도 모른다. ‘비행(飛行)의 공포를 이길 수 있게 하는 커다란 날개를 말이다.




 

 책 소개(알라딘 제공)



「타임」 선정 1970년대를 지배한 도서 TOP10, 전세계에서 2700만 부가 판매된 전설의 베스트셀러, 한국어판 출간 당시 음란성을 이유로 지형(紙型)이 소각되는 수모를 겪었고 그 후로도 <날으는 것이 두렵다> <침대 밑 사나이> <꿈의 회의로부터의 보고> 등 다양한 한국어(해적)판이 출간된 문제작. 


 네 번의 결혼과 거침없는 성적 상상 등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고스란히 담긴 소설, 작가 에리카 종을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만들고 가족과 의절하게 한, 그러나 이제는 미국 펭귄 출판사에서 40주년 기념 에디션을 제작하는 명실상부한 고전. 다양한 수식어마저 뜨거운 에리카 종의 소설 <비행공포>의 최초 한국어판이 도서출판 비채에서 출간되었다. 


 '여성은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에 온몸으로 답한 주인공 이사도라의 '성적 모험담'은 4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당혹스럽고 생동감 넘친다. 2013년 올해로 한국 생활 24년을 맞은 서울여대 스티븐 캐프너 교수가 작품 해설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