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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독서, 글쓰기/문학/에세이

황현산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2)


처음 이 숙독질을 시작할 때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는 우리 대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빌린 책이다보니 필요한 부분에 줄을 긋고 느낀 바를 메모로 남기려면 '내' 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로 책을 샀다. 마침 알라딘 인터넷서점에 적립금이 쌓여 있었다. 모든 책들이 내 책이면 얼마나 좋으련만. 입에 풀칠 정도만 해도 좋으니 책 살돈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을 빈다.





눈이 안 좋은지, 더위 때문에 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루쯤은 괜찮겠지하고 포스팅을 하루 쉬었는데, 그 하루가 일을 부렸는지 귀찮아졌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잡고 글을 올리고 있는데, 페이스를 잃으면 안 될 것 같다. 구글 애드센스 광고도 달았는데, 그것을 발판 삼아서 더 열심히 쓰려고 한다. 또한 꿈을 위해서라도.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는 읽으면서 항상 드는 생각은 닮고 싶은 문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문장들을 곱씹다보면 아마 이 문장들과 닮은 문체를 만들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만의 문장을 만들어낼지도. 열심히 써야겠다. 다독. 다상량. 다작. 마음에 새길 말이다. 



 

 과거도 착취당한다





먼저 외국의 서적상에게 구입할 책의 목록과 편지를 보내 청구서를 받은 다음 외환관리 당국에 외환사용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고는 은행에 송금수표를 끊어 외국의 서적상에 보낸다. (10쪽)


서적 통관이 쉬운지 아느냐,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책이라도 있으면 어쩔 거냐고 공격한다. (11쪽)



책을 읽고 책에 대해 글을 쓰는 공부를 하고 있지만, 책을 이토록 어렵게 구해야 한다는 상상은 해보지 못했다. 지금이야 집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만으로,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으니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70년 대는 반공주의가 강할 때라 문학이론에 필수적인 루카치의 책이나 동류의 책을 구하려면 꽤나 힘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전부 마르크스주의자인 문학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읽으면 '지금 세상이 공부하기는 좋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공부의 시대라 할 만큼. 


하지만 공부하기는 쉬워도, 공부를 하면서 먹고 살기에는 어려운 시대다. 예전이야 대학만 나와도 직장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취업을 하기엔 너무 힘든 세상이다. 특히 공부를 한답시고 대학원에 가는 이들이라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70년 대는 반공주의 때문에 책을 구하기 힘들었지만 요즘에는 돈이 없어서 책을 구하기 어렵다. 과거엔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었다면 지금은 돈이 없어서 구할 수 없다. 무언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뭐 도서관에서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 할 말은 없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밖으로 나왔다. 내가 공부를 하는데 국가가 왜 방해를 하느냐, 아마 이런 말이었으리라. (11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 과연 내가 미친 사람처럼 '내 공부를 왜 방해하느냐'고 저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저렇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을까, 공부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인데 과연 저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까 자문하는 기회가 됐다. 아직까지 책을 못 구해 공부를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해서 이런 마음을 가져보지는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선생의 열정은 본받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이런 열정이 없다면 앞으로 공부를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항상 마음에 새겨놓자고 다짐했다.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 (중략) ~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12쪽)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12쪽)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12쪽)



박정희의 유신 시대를 체험해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나쁜 시대였는지, 얼마나 힘겨운 시대였는지는 알고 있다. 어쩌면 일반 서민들에게는 항상 같은 시대였을지는 모르겠다. 살기에도 벅찬 일이었으니까. 아마도 그래서 대학생들이 먼저, 독재라는 것을 알고 느낄 수 있는 대학생들이 먼저 일어섰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과연 그랬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요즘 박정희를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많다. 나도 피부로 느낀다. 보통 중고등학생들이 대부분이지만 대학생이나 더 이상의 사람들도 있다. 아마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일 것이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의 아버지로만 알기 때문이다. 독재가 뭔지 피부로 느껴보지 못했으니까. 선생이 분노할 만도 하다. 극우가 득세하는 지금 두려움을 느낀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12쪽)



 

 모자 쓴 사람은 누구인가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15쪽)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15쪽)



12년 동안 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딱히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험을 치느라 바빴지, 공부다운 공부를 해본 적은 없었다. 어떤 글을 보고 깊게 생각해보거나 의미 있는 토론이나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 시험을 잘 볼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잘 외울 것인가. 이런 고민 밖에는 없었다. 선생의 말처럼 일반적인 학교 교육의 코드는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었고, 그 각본에는 어떤 의문도 가질 순간이 없었다. 


이런 교육환경 속에서는 어떤 고민도 어떤 토론도 어떤 질문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교육된 사람은 규정된 사회를 움직이는 역꾼 외에는 될 것이 없다. 기득권 층이 만들어놓은 구조물의 기둥이나, 엔진의 톱니바퀴처럼. 한 사회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인간은 기계가 될 뿐이다.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얻고, 제대로 생각할 가능성을 얻어야 하는데 이 사회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스스로 깨치고 그것을 얻은 자 외에는.



코드의 바탕 자체가 문제라는 이야기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5쪽)



선생이 쓴 글,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말.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아마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들은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코드'를 가지고 우리를 지속적으로, 강압적으로 쥐고 흔들 것이다. 스스로 공부해서 이 코드를 바꾸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 코드는 유지될 것이다. 선생의 글이 내가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을 정리해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