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다.”

 

며칠 전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해 이렇게 썼다. 대학원 박사과정 지원 원서를 대학원 행정실에 제출하고 난 후였다.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내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딸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페이스북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 들어갔다고 선언한 것은 어떠한 불안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진로 때문에 불안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또래들이 어떤 미래를 살까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길은 이미 정해졌다고 믿었고 주변 또래들은 나를 부러워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이 서른이 다가온다는 부담, 내가 전공하는 주제에 관한 사회의 부정적인 평가, 선배가 처한 상황 등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확고부동한 믿음에 점점 실금이 생겨났다. 그것은 석사학위를 따고,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대학의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직접 번 돈을 손에 쥔다는 경험은 책을 읽으면서 얻는 깨달음처럼 달콤했다. 그래도 믿음을 완전히 깨뜨리고 불안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한숨이 습관이 될 만큼, 나를 불안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하나의 책이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책표지 ⓒ은행나무

 

허울을 벗긴 대학의 민낯

 

바로 지방시라고도 불리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은행나무, 2015)란 책이다. 지방시는 3091201호라는 특이한 필명의 저자가 쓴 책으로, 대학 내 대학원생이자 시간강사가 처한 상황을 고발하고 있다. 저자는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글을 풀어내는데, 거기에 가공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날것의 내용이 더해지니 어떤 감성적인 글보다도 가슴 깊이 절절함이 박혀들었다. 나는 저자와 같은 처지라 더 공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방시의 절절함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닌 듯하다. 지방시 관련 기사가 언론에서 쏟아지고 있다. 매일 들춰보는 신문들의 오피니언면에도 연일 관련 칼럼이 게재될 정도다. 대학이라는 허울에 가린 열악한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처우가 충격적이기도 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아마 시간강사 해고법이라 불리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다음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어떤 집단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법안은 모순적이게도 모두 그 집단을 파괴했다. 기간제법, 파견법 등 비정규직 보호법이 그러했다. 시간강사법 역시 유예되기 이전까지 동일한 방향으로 흘렀다. 과거를 답습하는 법의 시행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으로 연명하던 시간강사 대부분이 해고되고, 지도교수의 애정을 놓고 벌어진 충성경쟁에서 승리한 일부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물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23일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시간강사법 시행을 2년 유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긴 했다. 아직 국회 본회의가 남아있긴 하지만 사실상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현상유지일뿐더러, 2년 뒤에는 또 같은 일을 겪어야한다. 나도 2년 뒤 박사과정을 수료하면 시간강사의 삶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라, 걱정이다. 이제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지방대 시간강사라도 될 수 있을까

 

책을 통해 얼핏 바라본 저자의 삶에서 느낀 것은 반반이라는 감정이었다. 등록금이나 밥벌이는 같은 인문계열 전공이라 얼추 비슷했다. 하지만 저자의 대학원 생활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인적인 것이었다.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천국을 거닌 셈이었다. 제자의 사정을 아는 교수와 좋은 동료 덕에 편한 대학원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저속하지만 이상한 안도감도 들었다.

 

한편 저자의 시간강사 생활을 엿보며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는 이미 시간강사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책을 통해 본 저자는 좋은 선생이었다. 학생을 이해하려고, 학생을 위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시간강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본()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가 시간강사로 활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년 뒤 시간강사법이 원안대로 통과될 수도 있고, 내가 속한 학과가 인문계열이라 곧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말 그대로 반반이다. 안도감과 부러움이 교차했다. 지방시가 불러일으킨 긍정과 부정이 뒤섞인 감정이 앞으로 있을 대학원 박사과정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고만 것이다. 이미 지방대 시간강사인 저자가 버티지 못한 삶을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라도 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에 휩싸인 내가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고, 남은 것은 다가올 캄캄한 미래를 어떻게든 견뎌내는 일뿐이다.

 

함께 버텨낼 사람만 있다면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었을 여러 인연들과 나는 점차 이별했다. 내가 기댈 곳은 몸담고 있는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인문계 대학원에는 남자가 부족했고, 있다 하더라도 나와 또래인 이들은 거의 없었고, 더욱이 친구가 될 동갑은 전혀 없었다.”(57)

 

지방시의 모든 내용에 공감했지만, 유독 눈길이 간 내용은 친구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 역시 남자가 부족하고, 또래가 거의 없고, 동갑인 남자는 물론 여자도 전혀 없다. 또래가 아니면 아무래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또 관계없음에서 오는 외로움은 사람을 좀먹고 모든 의욕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물론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공부한 것을 토대로 서로 대화하고 비판하는 일도 중요한 공부 방법 중 하나다. 또 같은 길을 함께 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큰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이는 저자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서 버텨내고 있었다는 허벌이란 친구가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동지적 인간관계는 중요하다.

 

얼마 전 페이스북을 뒤적거리다 지방시의 저자가 대학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접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공감해줄 것이라 믿었던 동료의 타박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열악한 환경은 견딜 수 있어도 인간적 실망은 버티기 힘든 법이다. 동료에게마저 버림받은 집단에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대학은 한 명의 뛰어난 연구자와 좋은 선생을 함께 잃었다.

 

앞으로도 대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편승해 끊임없이 줄이고 자르고 통폐합할 것이다. 또 대학에 적을 둔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듯 엄혹한 대학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은 함께 버텨낼 사람을 찾는 것 외에는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이 체온을 나눌 때 눈보라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와 허벌의 관계처럼, 내게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가 있다. 이 글을 빌어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지은이 - 309동1201호

  출판사 - 은행나무

  출간일 - 2015년 11월 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s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6.01.02 06:08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흠.. 잘지내고 있는거죠?..
    올해도 꼭! 건강하게 우리 잘 버텨봐요.

    글을 보니..맘이 너무 아파요.
    밥 잘챙겨먹고요.

Leave a Comment

한숨이 늘었다. 내뱉지 않으려 노력해봤지만 한숨은 무의식적이다. 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믿진 않지만 내년이면 아홉수라 찜찜한 탓일까. 아니면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원서를 넣어야할 때가 머지않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잠시 쉰다는 핑계로 1년간 일했던 조교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해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지만 전부 마땅치 않다.

 

평소 억지로라도 했던 독서도 한동안 그만뒀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쳐다보는 데 일상 대부분을 소비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업무적인 사고까지 터져버렸다. 정신은 혼미했고 시간은 그저 그랬다는 듯이 흘러갔다. 사고는 가까스로 수습했다. 지친 정신을 달래려 얼마간의 휴식을 취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달이 지났다.

 

되찾은 정신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쉬운 깨달음을 하나 툭 던져줬다. 네가 느끼는 의문들의 원인은 모두 불안 때문이라고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불안을 견디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독서였다. 마침 여유가 생겨 한동안 잡히지 않던 책을 집어들 수 있었다. 여러 책을 읽어나갔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힌 건 <비정규 사회>란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내가 겪고 있는 불안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비정규 사회>, 책표지 ⓒ후마니타스


불안은 어떻게 영혼을 잠식하나

 

얼마 전 대학언론사에서 함께 일했던 동기를 오래간만에 만났다. 동기는 방송국에서 프리랜서 FD로 일하고 있었다. 동기는 방송국 PD 공채시험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일을 그만두면 보호장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는 기분이 들어 두렵다고 했다. 불안하다고 했다. 동기의 이야기를 담담히 듣고 있었지만 나도 같은 기분이었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쓸쓸히 죽어가는, 비극적이지만 특별하지도 못한 그저 그런 미래가 떠올라서다.

 

<비정규 사회>에서 그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도 처참하다. 마땅히 주어진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을 저당 잡힌 비정규직. 잘릴까봐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제대로 된 공간에서 쉴 수도 없는 비정규직. 정당한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비정규직. 이것이 불안한 현실이며 절망적인 실재다. 디스토피아가 존재한다면 모두가 불안에 사로잡혀 사는, 바로 지금 한국의 모습일 것이다.

 

세상을 속여 이익을 취하는 부류는 나나 동기가 겪는 불안이 극복될 수 있다며 거짓된 말들을 풀어놓는다. 자기계발이나 힐링 타령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안은 극복될 수 없다. 불안은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부터 덮쳐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를 통제할 수 있는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불안은 다만 완화될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의 능력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불안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폭력이 된다.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이 한 언론사의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때는 왜인지 모를 거부감이 몰려왔다. 아마도 천재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소위 노오오오력하라는 꼰대에게 소비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꽉 막힌 현실까지 뚫어낼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예외다. 그들은 하늘이 콕 집어 지정한 사람이니까. 앞서 언급한 조성진에서부터 피겨스케이팅에서 전설적인 족적을 남긴 김연아, e스포츠 종목 중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독보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Faker 이상혁까지. 왜 이들을 빗대어 청년들에게 노력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며 폭력을 휘두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각박한 현실은 능력주의가 환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데 말이다.

 

지금 연대가 정말 가능할까

 

앞서 불안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화될 뿐이라고 했다. 불안의 완화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회만이 가능한 일이다. 외부에서 엄습해오는 불안은 사회가 아니고서는 막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이에게 스스로 불안을 극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동이 불안정하고 실업이 만연한 시대일수록 일자리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존은 고용과 임금을 통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생존권은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보장받아야 할 독립적인 권리이다.”(145)

 

하지만 세상은 생존권 보장은커녕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며 닦달한다. 여기에다 자본가,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가상의 신분질서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이간질한다. <비정규 사회>는 말미에서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은 암울하다.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말 속에 암울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 추세라면 개인은 모두 파편화돼버리고, 연대의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다. 책은 연대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으나 희망의 가능성은 점점 옅어지고 있는 아이러니라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연대는 파편화된 개인들 모두의 몰락 이후에서야 간신히 피어날 지도 모르겠다. 마르틴 니뮐러가 남긴 말이 폐부를 찌른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비정규 사회

  지은이 - 김혜진

  출판사 - 후마니타스

  출간일 - 2015년 9월 18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s

  1.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5.11.28 00:5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꼰대들은 얼마나 더 많이 노력해야 정말 노력했다고 인정해줄까요? 요즘 어지간한 사람들 다 먹고살기 위해서 어지간히 노력해요. 노력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밥벌이가 안되는 세상이니까요. 거기서 더 노력하라면 잠을 줄이거나 등의 방법을 써야 하는데 이런 방법들은 건강에 치명적이죠. 정신분열증 같은 심각한 정신병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잠을 너무 적게 자고 너무 많이 일하는 것이라고 해요. 난 정말 꼰대들이 하라는대로 진짜 열심히 해서 잠도 줄이면서 노력했는데 결국 정신분열증 걸려서 인생이 망했다 이러면 과연 그들이 책임이나 져 줄까요? 그런 꼰대들이 진짜 노력의 댓가로 병걸려서 정신장애인된건 모르고 정신장애인 차별은 오히려 더 많이 하죠.

Leave a Comment

쉼은 항상 달콤하지만어쩌다 한 번씩 쉬는 게 지루할 만큼 늘어지는 날이 있다그럴 때면 산책을 나가곤 한다주섬주섬 널브러진 옷가지를 챙겨 입고는 집을 나선다귀에 이어폰을 꼽고는 산책로를 터덜터덜 걷다보면 지루함이 살짝 가신다익숙할 만큼 익숙해졌지만 집에서 뒹구는 것보다는 산책이 덜 지루하니까.

 

십여 년간 한 동네에 살다보면 산책하는 길 곳곳에 기억이 묻어 있다눈가에 머무는 풍경에서 옛 자취를 읽어내다보면 지루할 새가 없다나는 옛 일을 쉽게 잊는 편이다잊는다기보다 묻어둔다는 표현이 적확하겠다장소나 물건 같은 매개물에서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산책은 길가의 풍경에서 추억을 캐내는 일종의 놀이다.

 

음식도 마찬가지 아닐까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엄마의 맛을 느낀다면순간 엄마와 관련된 기억이 솟구쳐 오른다옛 연인과 자주 갔던 음식점에서 옛 연인이 좋아했던 음식을 먹었을 때도 기억은 가슴 깊은 곳에서 제멋대로 튀어나온다이렇듯 음식은 기억의 프리즘 중 하나다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제목의 책도 있잖은가.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지만그 중에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이 있다누구나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물론 메뉴는 개개인마다 다를 것이다엄마의 밥상일 수도먼 타지 여행의 고단함 속에서 먹었던 컵라면 하나 일수도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3개를 받은 레스토랑에서 맛봤던 음식일 수도 있다당신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무엇인가.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책표지 ⓒ한길사

 

꿀떡 넘기기보다 꼭꼭 곱씹어보기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박완서성석제 등의 작가들을 비롯해 김진애 도시건축가김갑수 평론가 등 여러 유명인사가 자신만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에 대해 쓴 글을 엮은 책이다책을 다 읽고 난 후 글을 쓰기 위한 자료를 찾으려 이리저리 인터넷을 배회했다그 와중에 발견한 것은 이 책이 새로 나온 것이 아니라 개정판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지금 시점에 개정판을 낸 것일까짐작컨대현재 대중문화의 추세 때문일 것이다요즘 TV에서는 음식들의 향연이 한창이다과거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먹방의 인기를 이어현재는 셰프들의 현란한 요리 실력을 자랑하면서도 시청자에게 쉽고 맛있는 요리 레시피까지 알려주는 쿡방이 대세다이 책과 지금의 대중문화 트렌드딱 어울리지 않는가.

 

더군다나 개정판에는 박찬일 셰프의 글을 덧붙였다니 현재 대중문화의 흐름에 편승하기 위해 출판사에서도 상당히 신경 쓴 듯하다하지만 단지 트렌드를 따른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를 손쉽게 평가 절하하는 것은 성급하다지금 유행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이 책만의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음식에 관한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한다뿐만 아니라 음식이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 사유하게 만든다맛에 빗대자면현재 유행하는 TV 예능프로그램이 꿀떡 넘기게 하는 화려한 맛이라면이 책은 여러 번 곱씹게 만드는 은은한 맛이다개인적으로는 휘황찬란한 TV 예능프로그램의 눈부심을 조금은 환기시킬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엄마 밥상

 

에스프레소의 세밀한 맛을 깊게 파고들어가기 위해 커피머신까지 국외에서 공수해오는 김갑수 평론가우연히 들린 묵밥집의 묵밥 맛을 잊을 수 없어 제갈량의 팔진도 같은 경기도 길을 헤메고 다녔다는 성석제 소설가일본에서 이웃과 정을 나누며 먹었던 나베 요리를 떠올린 고경일 시사만화가까지다양한 밥 한 그릇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엄마 밥상이었다지금 세상의 셈법으로는 멋없고 투박한 엄마 밥상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남이 보면 당연히 화려한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에 비해 엄마 밥상은 볼품없다하지만 엄마 밥상의 맛은 자식이라면 낙인처럼 혀에 박힌다그래서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박찬일 셰프는 요리를 집안 내림이라고 표현했다그것은 누군가 꼼꼼히 조리법을 적어서 물려주지 않아도 그 맛이 혀에 누적된다는 뜻이며 맛은 지독히도 보수적이어서 좀체 자기 성문을 열지 않는다”(224)는 것이다우리가 엄마 밥상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것은 나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그래도누가 뭐래도 엄마 밥상이 최고인 이유다.

 

그렇다면나는?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볼 차례다나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뭘까일주일에 한 번씩 먹을 만큼 좋아하고 뜯는 맛이 일품인 치킨일까도쿄로 여행을 갔을 때 시부야에서 먹었던 초밥일까좋아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데려갔던 비싼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일까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고개를 젓는 횟수도 함께 늘어난다.

 

뇌리에 박혀 있는 기억들은 대부분 맛있는 음식일 뿐이다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가슴 깊은 곳에 상흔처럼 새겨져 있다내가 죽기 전까지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엄마가 해준 카레엄마가 해준 닭볶음탕일 것이다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한 번 떠올려보시라당신만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은 어떤 것인가.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지은이 - 박완서 외 12명

  출판사 - 한길사

  출간일 - 2015년 9월 21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Leave a Comment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 동네 뒷산으로 가는 소풍이 정말 싫었다. ‘동네 뒷산이라는 멋없는 호칭처럼, 그곳은 초등학교 때 나에게는 진부함 그 자체였다. 그때의 나는 소풍이라면 마땅히 새로운 곳을 가야하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한나절도 되지 않는 소풍은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에는 너무 짧았고, 결국 소풍 장소의 대부분은 동네 뒷산이 차지했다.

 

동네 뒷산은 오봉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마 다섯 개의 봉우리가 동네를 감싸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는 소풍을 지루하게 만든 오봉산을 마냥 싫어했다. 하지만 20여 년간 한 동네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오봉산은 이제 추억이 됐다. 이따금 오봉산을 바라보면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곤 한다.

 

오봉산은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 동안 함께 했지만, 나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 정도의 의미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번에 오봉산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최원석 교수의 <산천독법>을 읽고 나서다. 책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산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산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인문학적 성찰은 무엇인지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한다.


<산천독법>, 책표지 ⓒ한길사

 

주산, 마을을 설계하는 핵심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지세가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면하여 있다는 뜻이다. 풍수에 따르면 이러한 배산임수 지형은 마을이 들어설 만한 이상적인 터라고 볼 수 있다. 소위 말하는 명당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만 해도 주거지 뒤편을 산이 감싸고 있고, 앞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규모가 있는 동네라면 대부분 배산임수 지형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책에서는 이러한 동네를 등진 산을 주산이라고 부른다. 내가 사는 동네라면 오봉산이 주산일 것이다. 주산에 따라 동네의 모습이 바뀐다. 배산임수라는 명당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주산을 등져야만 하니까 말이다. 그만큼 주산은 중요한 존재였다. 심지어 조선 왕실에서는 주산이 어디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주산 논쟁을 끝내기 위해 세종이 직접 산에 올라 답사까지 했다니 주산의 중요성을 알만 하다.

 

일찍이 조선 초 한양 천도 당시에 하륜의 무악(안산) 주산론이 있었고, 야사이지만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론도 전한다. 그때 만약 주산을 달리 정했다면 한성의 공간구조는 전면적으로 달라졌을 테고, 지금의 서울 모습과는 딴판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주산이 중요한 이유는 공간디자인을 결정짓는 기준점이자 방향축이기 때문이다.”(본문 22)

 

조산, 없으면 만들어라

 

처음에 우리 조상들이 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이라는 마음부터 들었다. 찬찬히 책장을 넘기다 보니 산을 만들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됐다. 산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확실히 느꼈다. 산이 없어 산을 만들기까지 한 마음에 책을 읽으며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단 몇 숨도 쉬지 못하면 죽지만 공기를 느끼지 못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지나치는 것에 지중한 가치가 있다. 조산이 그렇다. 조산은 마을 입구에도 있고, 고갯마루에도 있다. 돌무더기로도 있고, 숲으로도 있으며, 장승이나 솟대, 심지어 남근석의 모습으로도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모두를 조산이라고 한다. 형태는 달라도 기능이 같은 산의 상징이라 그렇다.”(본문 39)

 

산을 만드는 행위를 조산(造山)이라고 한다. 산은 다양한 이유로 만들어졌다. 겨울의 찬바람을 막거나 흉한 모습을 가리는 등의 기능적인 면도 있지만 풍수적인 영향이 크다. 산이 없는 평지에 마을이 있으면 마을 뒤편에 숲을 만들어 산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마을 주산의 형태에 따라 필요한 산을 만들기도 했다. 주산이 용의 형상이라면 여의주를 상징하는 조산을 만드는 식이다.

 

풍수적으로 용의 형국에 필요한 여의주, 봉황의 형국에 필요한 알, 배가 가는 형국의 돛대 같은 상징성도 갖는다. 마을에서 마주보이는 산의 특정 부위가 음부 형상으로 보이거나 여근 모양의 바위가 있을 경우에는 음풍을 막는 남근석 조산도 있다”(본문 48~49)

 

산은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무심코 산을 오른다. 하지만 단풍을 보기 위해, 다이어트를 위해, 건강을 챙기기 위해 산을 오를 뿐, 산을 읽기 위해 오르진 않는다


앞서 산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만 이야기했지만 산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산은 수많은 동물과 식물을 품고 있다. 산은 수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 산은 무궁무진하다. 산은 우리가 그것을 읽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시간은 흘러가버려 허망하기 짝이 없다. 공간은 무색으로 텅 비어 있어 무정하다. 그러나 산천은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그 무엇이다. 모두가 차곡차곡 저장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나는 산천을 거대한 메모리라고 생각한다. 역사도 조상도 자연생태도 모두 담겨 있고 또 앞으로 담길 그 무엇이다. (중략) 산의 보장(寶藏), 산천메모리다.(본문 11)

 

언젠가 동네 뒷산에 오를 여유가 생긴다면, 산에 올라 그 산이 품고 있는 보물들을 캐내보는 건 어떨까.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산천독법

  지은이 - 최원석

  출판사 - 한길사

  출간일 - 2015년 8월 28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Leave a Comment

SNS가 우리의 일상을 점령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모두 스마트폰을 붙들고 SNS의 뉴스피드를 확인한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온 후 SNS에 올리기 위한 사진을 찍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됐다. 대한민국에서 소위 ‘SNS 삼대장이라 불리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는 이제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이 향유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SNS를 확인하고, 잠들기 전까지 SNS를 확인하는 시대다. SNS가 일상에 빼곡히 틈입한 것이다. 때문에 기존에 없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남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편집한다. SNS에 올라오는 남들의 좋은 모습을 보며 실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한다.

 

자신과 남을 계속 비교하면서, SNS에 남들보다 더 나은 사진이나 더 자랑할 만한 사진을 강박적으로 올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자투리 시간이 생길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SNS를 확인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SNS를 확인하느라 매일 몇 시간씩 낭비하고 있다. 한 마디로 SNS중독된 것이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인 수재나 E. 플로레스의 <페이스북 심리학>SNS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함에 따라 어떤 문제들이 나타났는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물론 <페이스북 심리학>은 제목처럼 분석대상을 페이스북에 한정하고 있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월 이용자 수가 10억 명(2012년 기준)에 달하고, 미국의 대다수 시민이 이용하기 때문에 이를 SNS 일반까지 확대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페이스북 심리학>, 책표지 ⓒ책세상

 

자기 편집의 위험성

 

살이 찐 게 걸리는가? 문제없다. 5년 전에 찍은 사진을 올려라. 그게 먹히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포토샵이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죄다 편집 가능하다. 우리는 마음껏 자기 삶을 재창조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우리의 정체성을 재창조할 수 있는 힘은 정말 기이하다.”(본문 45)

 

‘SNS에 올리는 사진은 수십 장 찍은 사진 중에 가장 잘 나온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여러 사진 중에서도 셀카(셀프카메라)를 올릴 때 가장 공들인다고 한다. 나였다면 차라리 안 찍고 말았을 테다. 하지만 가장 잘 나온 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일견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버려진 수십 장의 사진에 찍힌 것이 과연 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를 찍은 사진이 잘 나왔든 못 나왔든 간에 그것은 모두 . 하지만 SNS가 우리의 일상을 점령해나갈수록 SNS는 편집한 나를 진짜 나라고 믿게 만든다. SNS상의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해주지만, 그에 비해 현실의 나는 비루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포스팅은 단순히 자신의 하루를 보여주고 업데이트하는 것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좋은 면만을 올리고 나쁜 면은 숨겨야 한다는 압박감을 점점 더 느끼고 있다.”(본문 43)

 

SNS에 올려진 나를 진짜 나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현실의 나와의 괴리는 점점 커진다. 결국 화려한 SNS에서의 나와 상대적으로 비루한 현실을 비교하면서 우울증에 빠진다. 이것이 심해지면 비루한 현실을 외면하고 SNS의 화려한 나에게 중독되는 것을 선택한다. 실제 자신보다 자신의 SNS 아바타를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10대가 위험하다

 

한국에서 SNS가 발달하고 대부분의 사람에게 스마트폰이 쥐어진 것은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현재 SNS가 일상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20대 후반에 접어든 나는 일상을 망가뜨릴 만큼 SNS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10대는 다르다. 지금 10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을 접하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 세상이다. 아이들이 울면 이제 안고 달래주기보다 뽀로로 영상이 나오는 스마트폰을 건네줄 정도다. 이러한 시대를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이들을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즉 현재 10대들에게 디지털은 삶의 터전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를 비롯한 어른들은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이 있다. 어린 시절을 디지털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에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10대는 다르다. SNS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SNS를 자신의 삶에 일부라고 여길 확률이 높다. 때문에 SNS가 주는 여러 부정적인 영향력에 아주 쉽게 노출된다.

 

특히 자아정체성을 형성해야만 하는 10대들에게 앞서 언급한 자기 편집의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자아정체성을 제대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나를 직면해야 한다. 하지만 SNS 활동에서 요구되는 자기 편집은 이를 가로막는다.

 

페이스북의 기능들은 자기 정보를 편집하고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게 만들었고 이는 우리의 자아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자기 가치감과 관련된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다. 극단적인 수준에서는, 셀카를 포함하여 자신이 올리는 포스팅에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에 따라 자기 가치를 규정한다. 자기 편집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점점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순수한 자기표현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진짜 자신을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본문 259)

 

현재 10대들은 이러한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특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교육만 받는 학생들은 성찰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SNS 환경 역시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부터라도 주체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SNS를 비롯한 디지털 세계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용당하기보다 이용하기를

 

SNS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의 10대가 디지털 네이티브인 터라 조금 더 위험할 뿐이다. SNS는 단지 SNS일 뿐이다


물론 SNS에 올린 자신의 편집된 삶이 SNS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행복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 직면하는 순간 무너져 내리고 마는 신기루일 뿐이다.

 

더욱이 SNS에 올리는 삶의 일부는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삶일 뿐이다.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은 공허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릴 적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다 지쳐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SNS라는 타인에게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우를 범할 것인가. 행복은 스스로 결정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페이스북에 무엇을 올릴지를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근거하여 결정하면 그들에게 당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힘을 넘겨주는 셈이다.”(본문 241)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 입니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페이스북 심리학

  지은이 - 수재나 E. 플로레스

  옮긴이 - 안진희

  출판사 - 책세상

  출간일 - 2015년 9월 30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s

  1.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5.10.27 23:25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하긴... 저만 해도 SNS에 올릴 사진 찍으려고 스튜디오까지 가서 사진찍었으니 저도 SNS중독일수도... 근데 SNS의 장점도 많아요 SNS에는 업무와 관련된 중요한 최신정보들도 꽤 있거든요.

Leave a Comment

우토로 마을이 <무한도전-배달의 무도>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 교토에 자리한 우토로 마을은 일제가 군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동원한 조선인 노동자 집단거주구역이었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군 비행장 건설은 중단됐고, 그대로 방치됐다.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한 조선인 노동자도 우토로 마을과 함께 버려졌다.

 

우토로 마을에 남았던 조선인 노동자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넘어온 후 일본에 남은 이들은 스스로를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른다. 개인적으로 자이니치와 나치에게 쇼아(홀로코스트)를 당한 유대인에게 관심이 많다. 어떤 한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경계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는 모습은 자연스레 이목을 끈다.

 

이들을 일컬어 경계인이라 한다. 재독 사회학자인 송두율 교수는 자신의 저서 경계인의 사색에서 경계인을 경계의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서 상생의 길을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는 존재로 묘사한다. 한국인이라는 완벽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들의 존재가 이색적이어서 당연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이니치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역사적으로는 충분한 연관이 있기에 특별하다. 특히 자이니치인 서경식의 책들, 쇼아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프리모 레비를 다룬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리 미술을 다룬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탐독하면서 관심은 증폭했다. 이번에 읽은 일본제국 vs. 자이니치란 책 역시 앞서 언급한 관심과 같은 맥락에 있다. 자이니치의 어제와 오늘이 무척 궁금했다.


<일본제국 vs. 자이니치>, 책표지 ⓒ북콤마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자이니치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것을 이해해야만 했던 것이 있다. 자이니치의 국적과 관련된 이야기다. 자이니치는, 특히 자이니치 2세부터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어를 사용하며 일본에서 일본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일본인과 거의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이들은 국적만 일본이 아닐 뿐 일본인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자이니치는 한국 국적이나 조선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일본 국적을 택하는 자이니치도 있다. 하지만 미국 국적이나 타국 국적을 따지 못해서 안달인 우리와 달리, 자이니치는 한국 또는 조선 국적과 일본 국적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 자신의 국적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애쓴다.

 

자이니치에게 국적은 일본에서 당한 배제와 차별을 표상하는 것이다. 자신이 단지 한국 또는 조선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 즉 일본에 의해 가지게 된 것을 이유로) 배제와 차별을 당해왔는데, 현 국적을 쉽게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모독이 되는 셈이다. 그것은 일본에서 당한 배제와 차별에 굴복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이니치로서 이 같은 배제와 차별을 피해 스스로 특정한 공동체에 소속되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경계선에서 외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경계인의 삶은 당연히 피로할 수밖에 없고, 공동체의 안정감은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하지만 자이니치에서의 탈주는 보통 성공하지 못하고 끝난다.

 

한국에서 유학하는 자이니치 가운데 한국어를 완벽하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다. 자이니치인 사실을 모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완벽한 한국인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다. 어중간한 자이니치의 삶을 끝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누구도 완벽한 한국인이 되지 못했다.”(128)

 

일그러진 민족주의의 폐해

 

유학 당시 재미동포와 재중동포를 많이 만났다. 중국에는 조선족 자치구와 학교들이 있다. 집에서도 조선어로 말한다. 미국의 코리아타운에 가 봐도 모두 한국어로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미국인이라고,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말을 못하게 된 자이니치만 한국인·조선인이라고 하고, 국적도 유지하고 있다. 자이니치가 그러는 것은 코리안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지 이후 일본 사회의 문제다.”(75~76)

 

자이니치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은 이들을 배제하고 차별한다. 이는 일본제국주의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일본 사회의 문제다. 최근에는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 약칭 재특회가 등장해 자이니치에게 물리적인 폭력까지 행사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여러 일본 극우 정치인의 망언은 덤이다.

 

이 같은 일그러진 민족주의는 한국에서도 횡행하고 있다. 이주노동자, 특히 제3세계 이주노동자를 배제하고,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은연중에 차별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한국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민족을 강조하고 차별을 합리화하는 극우주의가 판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고 해서 자이니치나 다른 소수 집단을 특정 집단에 들어가라고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자이니치로 살아갈 수는 없나

 

자이니치는 일본 국적 취득에 거부감이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되면 일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일본 사람으로는 일본 사회가 받아주지 않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자신이 조선인임을 마지막으로 증명하는 것이 국적입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기에 자신만 알고 있는 아이덴티티의 증거입니다. 21세기에 왜 바보같이 국적 같은 것에 집착하느냐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373~374)

 

선택할 수 없다면 그대로 자이니치로 살아갈 수는 없을까. 말은 참 쉽지만 일본 정부가 도와주지 않으면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일본 정부가 계속해서 자이니치를 차별한다면 일본 사회도 자이니치를 차별할 것이다. 재특회는 끊임없이 날뛸 것이며, 자이니치는 일본 사회의 배제와 차별 속에서 자신의 어중간한 정체성 때문에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무한도전으로 촉발된 우토로 마을, 그리고 우리가 재일조선인, 재일동포, 재일교포 등으로 부르는 자이니치에 대한 관심이 민족주의로 환원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어가 모어(母語)이며, 일본인처럼 생활해온 사람들이다. 단지 국적만 일본이 아닐 뿐이다. 자이니치가 자이니치로 살 수 있도록, 그들 스스로의 역사를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이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 경계인 중 일부 인용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일본제국 vs. 자이니치

  지은이 - 이범준

  출판사 - 북콤마

  출간일 - 2015년 7월 15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Leave a Comment

매주 금요일마다 참석하는 모임이 있다. 글 한 편을 한 시간여 동안 소리 내 읽은 후, 자신의 생각을 서로 이야기하는 독서모임이다. 여섯 명이 모이는 조촐한 독서모임이지만 내겐 아주 소중하다


주변에 책을 읽는 또래가 거의 없을뿐더러, 주변 또래와 나누는 대화라곤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막막한 현실에 대한 한탄 외엔 없기 때문이다.


문학, 철학, 역사, 과학 등 인간을 묻는 질문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특별한 모임이 아니고서야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신 연예인의 열애설, 정치인의 스캔들 등 가십거리만 넘쳐난다. 사회에 진지함은 사라지고 이제 가벼움만 남았다. 한 소설가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 것이라 표현했지만, 이제는 존재의 무거움을 참을 수 없는 시대다.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는 나는 항상 인간에 대한 진지한 대화에 고프다. 그래서인지 나는 담론이 풍성한 유럽을 동경한다. 최근 유럽의 살롱, 클럽, 카페 등을 다룬 <담론의 탄생>이란 책을 읽고 난 이후 유럽을 향한 동경은 더욱 강해졌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그때의 유럽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에 몸이 달았다.


<담론의 탄생>, 책표지 ⓒ한길사


담론이 탄생하려면

 

프랑스에서는 매년 바칼로레아란 중등교육 졸업인증시험이자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른다. 프랑스 시민이라면 누구나 바칼로레아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는 다른 차원의 관심이다. 하나는 바칼로레아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관심이라면, 다른 하나는 시험 하나로 인생의 당락이 좌우된다는 걱정에 가깝다.

 

바칼로레아에서 던진 질문은 정답이 없다. 다음은 2015년 바칼로레아 철학과목에서 출제된 문제 중 인문계열 문제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존중은 도덕적 의무인가?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온 나의 결과물인가? 바칼로레아는 수험생뿐만 아니라 프랑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프랑스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의견을 교류한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담론의 탄생>은 이러한 풍경의 기원을 유럽의 살롱, 클럽, 카페 문화에서 찾는다. 살롱, 클럽은 각각 프랑스와 영국에서 출발했고, 카페는 전 유럽에서 성행했다.

 

살롱은 출생과 신분, 종파나 정치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다양한 사람이 만나는 자리였다. 그러면서도 세련된 취미와 예절, 새로운 역사를 향한 비전을 하나로 묶은 지성과 교양의 문예공화국을 형성했다. 살롱 문화는 날로 확산되어 상황에 따라자유자재인 프랑스적 삶의 양식, 문화의 양식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 밑바닥에 기쁨으로서의 이야기문화, 담론문화가 자리 잡았다.(81)

 

살롱과 클럽은 초기에 귀족가문 출신의 부유한 사람들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과거 책을 읽고 담론을 풀어놓는 일은 돈과 여유가 있지 않는 이상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와 특히 1789년 혁명이 표방한 인민주권의 세례를 받으면서(12)” 이러한 문화는 모든 시민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유럽의 담론문화는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침묵은 정말 금일까

 

찻잔을 놓는 자리로 넓은 곳은 마땅찮다거나 다석에 7~8명이 넘으면 잡스럽다거나 하는 이유로 기피하고 위계질서와 침묵을 미덕으로 내세운 유교 전통사회에서 카페 문화 같은 다관·다정문화를 어떻게 바랄 수 있었을까.(21)

 

한국에서도 과거 이야기문화, 담론문화라 불릴 만 한 것이 있었다. <담론의 탄생>은 대표적으로 선비 사대부의 사랑(舍廊) 문화를 예로 든다. 하지만 한계는 명백하다. “가부장적 체제를 반영하여 방주인을 따라 문벌과 학통, 정파를 함께하며 비슷한 신분에 비슷한 생각으로 이해관계를 공유한 사람들의 모임(112)”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침묵은 금이다라는 속담, 위계질서를 강조한 유교문화, 상명하복을 강요한 병영문화 등 다양한 문화적 기제가 한국에 이야기문화, 담론문화가 정착할 수 있는 토대를 막고 있다. 대학 강의에서 조차 질문하는 이를 오히려 신기하게 바라보는 학생들이 단적인 예다.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과거를 탓하느니 현재를 바꾸자

 

역사를 알고 반성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과거를 탓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은 없다. 선대에 이야기문화, 담론문화를 조성해놓지 못했다면 우리라도 이러한 문화가 들어설 토대를 만들어야할 것이다.

 

최근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이야기문화, 담론문화 조성을 위한 여러 움직임이 일고 있다. 수유너머, 다중지성의정원, 숭례문학당, 땡땡책협동조합 등 여러 모임이 만들어져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서를 위해 의기투합한 여러 소모임도 방방곡곡 생겨나는 것으로 안다. 내가 참석하고 있는 모임도 여기에 포함될 테다.

 

만남이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담론의 자리다. 우리는 저마다 나의 말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좋은 만남이란 내 말에 앞서 마주해 있는 사람,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자리다. 공자는 셋이 모이면 스승이 한 분 있게 마련이라고 하셨으며 사르트르는 말을 나눔으로써 나와 우리 모두는 세계를 발견하고 창조한다고 하셨다.(11)

 

내가 참석하는, 겨우 여섯이 모인 모임에서 어떤 거대한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꾸준히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다보면 작은 일이나마 이뤄낼 수 있는 힘은 생기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 말을 나누기 시작한다면 세계를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가 한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담론의 탄생

  지은이 - 이광주

  출판사 - 한길사

  출간일 - 2015년 4월 3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Leave a Comment

모처럼 연극을 보러 극장엘 가던 길이었다. 도시철도에서 내려 극장으로 걸어가던 중이었는데, 길가에 경찰 기동대 버스가 늘어서 있었다


어디서 시위를 하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생탁·택시 고공농성 해결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현수막 앞에서는 몇몇이 삼보일배를 하며 온몸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잠시 멈춰 서 그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공농성은 서울이나 평택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생활하고 있는 부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순간 아득했다. 세상의 부조리함에 저항하고 있는 그들이 대단했다. 나라면 부조리에 굴복하고 말았을 것이다. 침 한 번 퉤 뱉어버리곤 곧장 다른 일을 찾아 나섰을 테다.

 

시위 행렬이 지나가자 다시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에 도착하기까지 머리에 방금 장면이 맴돌았다. 거기에다 최근 읽었던 <나는 고발한다>는 책이 오버랩됐다. <나는 고발한다>는 니홀라스 할라스란 작가가 쓴 책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다루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드레퓌스라는 한 개인을 국가가 매장하려고 했던 사건이다.

 

<나는 고발한다>가 다루고 있는 드레퓌스 사건은 앞서 언급한 생탁·택시 고공농성과는 내용도 다르고 사건의 규모 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노동자를 호구로 보는 것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근거 없는 누명을 쓴 것은 모두 세상의 부조리함에 뿌리를 둔다. 그렇다면 드레퓌스 사건에서 지금의 부조리를 제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고발한다> 책표지, ⓒ한길사


견뎌냄이 부조리를 부쉈다

 

드레퓌스 사건은 일반적으로 지식인의 위대한 양심이 한 개인을 구원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완전범죄로 끝날 것 같았던 드레퓌스 사건을 반전시킨 것이 바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쓴 한 편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외딴 섬에 유배당한 지 3년 뒤인 1898113, 에밀 졸라는 <로로르(L'AURORE)>지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실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 책에 붙은 나는 고발한다란 제목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에밀 졸라의 이 위대한 결단은 전 세계의 옹호를 받았다. 나 역시 자신의 모든 명예를 내건 용기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명예를 내걸고 뛰어든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위대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드레퓌스 사건의 결말이 정의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던 까닭은 에밀 졸라의 결단이 아니라 드레퓌스의 견딤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견디지 않았다면 사건은 흐지부지 무마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견디지 못하고 죄를 시인했다면 에밀 졸라의 할아버지가 온다 한 들 무슨 소용인가.

 

슬픔으로 나는 심신이 부서져 내립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이런 불운을 당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 힘과 용기가 나를 저버린다면. (중략)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힌다는 것 이것은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121~122)

 

96일부터 밤이면 이중 버클이 채워졌다. 족쇄가 채워지고 나면 나는 돌아다닐 수가 없다. 침대에서 돌아눕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고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족쇄가 내 발목을 파고들었다.(131)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충성을 바쳤던 국가에게 반역죄로 낙인찍힌다면 어떤 기분일까. 세상의 모든 비난이 자신에게 쏟아진다면 무슨 마음일까. 외딴 섬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감시당하는 삶은 어떨까. 이 모든 일이 나에게 벌어진다면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아연실색할 만한 상황이다.

 

드레퓌스는 죽어서도 이해하지 못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견뎌냈다. 끝내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풀려난 이후 행보도 대단하다. 그는 반역의 누명을 쓴 치욕과 평생을 들어도 모자랄 비난을 당하고서도 제1차 세계대전에 프랑스의 군인으로 참전한다. 그리고 프랑스 훈장 중 가장 명예로운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영광의 군단)’을 받는다. 그는 견뎌냈고 끝내 부조리를 부쉈다.

 

사필귀정이란 고사를 믿을밖에

 

연극을 관람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스마트폰으로 생탁·택시 고공농성을 찾아봤다. 올해 416일부터 노동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이 외딴 섬에 유배된 드레퓌스 같다고 생각했다. 자본가는 돈 뒤에 숨어 그들의 심신이 무너져 내리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부조리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부조리를 제거하려 투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끝내 인간은 부조리를 말살하지 못했다


부조리는 바퀴벌레 같아서 박멸하는 만큼 새로운 부조리를 만들어냈다. 예컨대 과거 노예제도를 없앴음에도 현재 버젓이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자본가에게 있어 사실상 노예나 진배없다.

 

이 글을 적는 내내 씁쓸함과 부끄러움이 가시질 않는다. 내가 부조리를 처절하게 견디고 있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고사를 믿어보자는 말 외에는 없는 것 같아서다. <나는 고발한다>가 다루고 있는 드레퓌스 사건처럼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正理)로 돌아갈 것이라 믿는다. 지금도 높은 곳에서 사투하고 있을 그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나는 고발한다

  지은이 - 니홀라스 할라스

  옮긴이 - 황의방

  출판사 - 한길사

  출간일 - 2015년 8월 10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Leave a Comment

어떤 것을 창작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거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등의 상투적인 격언을 종종 듣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수도 없이 들어왔던 말이라 상투적인 것을 넘어서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비틀어 생각해보면 상투적이거나 진부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이제 당연까지 이른 것을 의미할는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격언들은 선대의 것을 끊임없이 습득해야만 그것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창작 행위는 선대의 것에 빚지고 있다는 말이다. 창작 행위는 어떤 한 개인이 그동안 경험했던 모든 것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개성이라는 바늘로 기워내 하나의 창작물로 재창조하는 작업인 것이다.

 

즉 대부분의 예술가는 앞서 길을 닦아놓은 선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성장하고, 또 뛰어넘기도 한다. 이러한 예술계의 메커니즘을 다룬 책이 나왔다. 바로 카롤린 라로슈의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란 책이다. 얼핏 보면 모작에 관한 내용을 다룬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예술 작품의 혈연관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해보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책표지 ⓒ월컴퍼니

 

발전시키거나 전복(顚覆)하거나

 

창조의 사전적 의미는 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인간이 신적 존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에게 통용되는 창조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기존의 것을 계승하면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기존의 것을 탈피해 도리어 전복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중 하나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의 여러 작품 중 대표 격인 <최후의 만찬>도 그의 완전한 창작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당시 “15세기 중반에 들어 르네상스 회화의 중심지, 즉 원근법이 탄생한 도시 피렌체에서 수도원 식당을 장식하는 단골 그림으로 등장(13)”했던 일화인 최후의 만찬의 내용을 차용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위대한 것은 기존에 통용되고 있었던 일화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르게 표현했다는 것에 있다. 당시 통용되던 최후의 만찬그림에서 배신자 유다는 배신하지 않은 다른 제자들과 구별될 수 있도록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기존의 통념을 답습하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유다의 위치를 다른 제자들 사이로 옮겨 놓았다. (중략) 레오나르도가 생각하기에 이 그림의 핵심은 마음의 동요였다. 그래서 그는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동요를 놀라움, 두려움, 사랑, 고뇌, 배신자에 대한 분노 등이 잇달아 표현되는 안무로 연출해냈다. (중략) 가운데서 유다는 멈칫하며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16)”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사례처럼 대부분의 창작은 재창작이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그림도 회화를 완결할 수는 없고, 어떤 작품도 그 자체로만 완결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창작품은 다른 창작품을 변조하거나 개선하거나 재창작하거나 먼저 창작한 것에 해당한다. 창작은 기득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것이며, 정해진 수명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7)”

 

Input이 곧 Output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1934년에 화가란 결국 무엇인가? 남들이 소장하고 있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기도 갖고 싶어서 직접 그려 소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시작은 그러한데 거기서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7)”라는 말을 남겼다. 예술가는 결국 가장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다른 보는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예술가들이 선대의 것을 끊임없이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존의 것을 토대로 놓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계승하거나 탈피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는 기존의 것이 전제돼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창작자에게 있어서 경험이란 Input이 없다면 창작이라는 Output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의 예술가들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경험해야만 하는 기존의 것이 너무 늘어난 탓이다.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예술가를 알고 그들의 작품을 보기란 요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도 정진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에 등장하는 모든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앙드레 말로가 <침묵의 소리>에서 주장했듯 예술은 형식으로 다른 형식을 정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저런 형식을 재량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작업이 예술인 셈이다.(7)” 정복하기 위해서는 정복하려는 대상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할 진리다. 이 진리가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에서 얻은 달콤하면서도 쓴 수확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 입니다.


 

 

책 정보(책 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글쓴이 - 카롤린 라로슈

  옮긴이 - 김성

  출판사 - 월컴퍼니

  출간일 - 2015년 2월 24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Leave a Comment

일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떠나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온다. 언젠가 지루한 일상을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말리라는 기대 같은 것 말이다. 삶이 고단해질수록 떠나고 싶은 욕망은 커진다


그래서일까. 요즘 여행을 가야겠다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다. 엄혹한 세상을 견디다보면 아무런 구속이 없는 곳에서 주구장창 책이나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여행을 떠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금단현상이 일어난다. 일탈이라는 해방감은 쉽게 떨칠 수 없는 것이. 아마 여행을 가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동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그러다보면 여행지에서 쭉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해방감이 가득한 저곳에서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제주도는 이러한 욕망이 작동하는 곳 중 하나다. 제주도는 올레길등이 유명세를 타면서 국내 힐링 여행의 메카로 떠올랐다. 이러한 제주도여행 붐 때문인지 제주도로 이주하는 인구도 급증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제주도는 2014년 한 해 3569가구가 이주했다. 이는 2013년도(204가구)에 비해 1649% 폭증한 것이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 속해 있지만 이국적이다. 언어나 문화의 차이도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제주도로 이주한다고 표현하기보다 이민한다고 말한다. 제주의 삶에 적응하기란 이민이라는 단어의 둔중함만큼 어렵다. 하지만 이민을 결심하는 사람들 대부분 여행의 설렘을 떠올린다. 그러다 여행의 설렘을 지나 삶의 고단함에 부딪히면, 끙끙 앓다가 다시 도시로 떠난다.

 

<푸른 섬 나의 삶>은 제주의 삶이 마냥 여행의 환상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담담하게 풀어낸 책이다. 저자의 제주 생활을 읽다보면 두 가지 느낌을 받는다. 치열한 고민 없이 쉽게 제주로의 이주를 생각하지 말라 엄포를 놓는 단호함.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함께 삶의 고달픔을 토로할 수 있는 친근한 지인 같은 따뜻함. 제주에 대한 저자의 애착 때문일 것이다.

 

<푸른 섬 나의 삶>, 책표지 ⓒ오마이북

서울 여자의 제주 착륙기

 

소소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일상. 불편함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한이 없을 테고,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터. 그래서 그냥 즐겁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마음 편히 살자고 온 제주 아닌가.”(31)

 

오랫동안 살았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을 때는 모든 것이 불편하다. 낯선 공간, 어색한 주변 공기, 어지러운 길들. 이외에도 익숙하지 않음 때문에 짜증이 불쑥 나기도 한다. 더군다나 제주는 다른 곳보다 그 간극이 더 크다. 육지와 제주의 간극만큼, 제주에서 받는 낯섦이나 어색함은 더할 것이다.

 

저자는 서울에서 누렸던 여러 편의시설과 괜찮은 직장에서 주는 월급을 포기하고 제주에 내려온 만큼 불편함을 즐겁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음식 재료를 사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하고, 배달음식은 어불성설인 곳. 위치, 방향에 관한 당황스러운 설명방식에다 고무줄 같은 영업시간이 가능한 곳. 저자에게 제주는 당황스럽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곳이다.

 

같은 상처를 내야 스며들 수 있는 곳

 

제주는 섬이라는 지형적 특성과 더불어, 해방 직후 벌어진 4·3 사건의 잔상이 남아 있어 외지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다. 참여정부 시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의 활동으로 진상규명과 정부의 공식 사과가 있긴 했다. 하지만 때늦은 사과는 한 풀이는 될지언정,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저자 역시 제주로 이주한 이후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서울에서 친구가 내려와 식당엘 갔을 때 한라산을 주문하면서 말이다. 한라산 종류를 설명하려는 점원의 말을 자르고 저자가 하얀 걸(한라산소주는 19.5도짜리 녹색 병과 21도짜리 투명한 흰색 병이 있다)로 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점원은 도민이세요?”라고 묻는다. 저자는 도민이세요?”라는 질문에서 꺼림칙함을 느낀다.

 

뭔가 꺼림칙하다. “도민이세요?”라는 질문에는 도민=토박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서울에서 살러 왔고 제주도에서는 아직 얼마 살지 않은 도민입니다라고 부연 설명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제주도가 좋아서 살러 온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은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63)

 

제주 이주민이 자연스럽게 제주도민으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지 여행지 제주가 좋아서 이민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제주도가 겪어온 역사의 상처까지 마음에 새길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아무래도 진정한 제주도민이 되기는 힘들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제주는 제주다

 

저자가 제주의 삶을 마냥 동경하고 있는 이들에게 현실은 이렇다고 엄포를 놓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주는 제주다


아름다운 바다와 우뚝 솟아 있는 오름이 있다. 독특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곶자왈도 있다. 유명한 곳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곳곳의 경관이 눈을 사로잡는다. 알 수 없는 제주만의 맛이 있다.

 

저자가 오월이네집이라는 셰어하우스를 만들어 제주 이민을 꿈꾸는 이들의 연착륙을 도우려는 것은, 환상적인 여행지 제주의 맛보다 제주 자체의 맛이 더 좋음을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뭉툭한 경계에 선 서울 처녀인 저자는 강정마을에 새겨진 글귀를 지도삼아 제주에서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갈 이를 기다린다.

 

조상 대대로 제주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제주의 자연을 그의 돈벌이로만 여기는 사람은 육지 것이며, 비록 어제부터 제주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제주를 그의 생명처럼 아낀다면 그는 제주인이다.”(140)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푸른 섬 나의 삶

  지은이 - 조남희

  출판사 - 오마이북

  출간일 - 2015년 3월 5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Leave a Comment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