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구조개혁평가가 한창이다. 대학구조개혁평가란 급격한 학령인구 감소를 대비하면서, 동시에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시스템이다. 교육부의 표현에 따르면 대학구조개혁평가는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구조개혁 방안으로 대학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대학구조개혁평가는 결국 교육부가 제시하는 지표에 맞추지 않으면 퇴출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대학의 대부분이 사학(私學)인 터라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대학은 퇴출당하지 않기 위해 혈안이 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예컨대 교사(校舍) 확보율을 높이기 위해 부랴부랴 건물을 짓고,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학내 일자리를 늘린다. 꼼수의 향연이 벌어진다. 대학이 교육부의 지표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다 보면 정작 대학생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등록금으로 근근이 운영하는 대학이 부지기수임에도 말이다.

 

촌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학구조개혁평가와 관련된 것 외에도 대학 문제가 수두룩하다는 게 더 촌극이다. 어쩌다 이지경이 된 것일까. 아직 대학에 머물러있다 보니 안타까움과 분노는 배로 크다. 속 시원한 해결책이 없는 것도 답답함을 키운다. <진격의 대학교>를 쓴 오찬호 역시 같은 마음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가 책에 쏟아낸 분노가 느껴졌다.


<진격의 대학교>, 책표지 ⓒ문학동네

 

기업의 노예가 된 대학? 무책임한 정부 탓!

 

<진격의 대학교>에서 언급한 내용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취업사관학교로 변해버린 대학, 살아남기 위해 기업화를 선택한 대학, ‘죽은 시민을 만들어내는 대학 등등. 많은 사람이 꼬집고 있는 대학의 고질적인 문제다. 하지만 현재 대학이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 <진격의 대학교>의 부제처럼 모두 기업의 노예가 된 탓인가. 이 지점은 되짚어봐야 한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지금 대학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기업의 노예가 된 대학은 징후이지 원인은 아니다. 지금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촌극의 책임은 기업논리 혹은 시장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학에게 자신의 의무를 떠넘긴 무책임한 정부에게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4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70.9%. 이는 83.8%로 최고점을 찍었던 2008년 대학 진학률에 비해서는 떨어진 수치이나 다른 국가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것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기업이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일차원적이다.

 

여타 선진국의 사례를 들춰보지 않더라도, 일자리를 만들고 국민이 취업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몇몇 사업으로 생색만 내고 있을 뿐 취업난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다. 대신 지원금이라는 알량한 무기를 휘두르며 자신의 의무를 대학에게 대신 지우고 있다.

 

대학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 취업률을 비롯한 요구지표를 상승시키지 않으면 재정지원을 제한하고 하위 대학은 퇴출시킨다지 않는가. 대학이 취업사관학교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다. 대학이 나서 기업에 빌붙지 않으면 취업률은 올릴 수 없다. 아양을 떨어야 일자리 몇 개 던져줄 것 아닌가.

 

물론 등록금으로만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대학은 퇴출당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도 정부의 무책임이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사학 비리에 미온적인 태도다. 대학을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루는 사학이 아직 곳곳에 넘쳐 난다. 하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사학 비리 재단을 쫒아냈다 싶으면, 얼마 후 다시 재단 이사로 복귀하는 것이 당연한 판국이다.

 

"‘시대의 조류인 변화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이 문제는 개인이 정신을 차린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개인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제어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146)

 

인문학이 죽어나고 관련 학과가 없어지는 현상의 끝에는 정부의 책임 회피가 자리하고 있다. 취업난은 전적으로 정부가 해결해야할 문제다. 대학에 맡길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기업과 협상해 대학 졸업장이 취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규제해야 한다. 의무교육만 이수해도 취업에 불이익이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생은 잘못이 없다

 

"인문학은 권력의 미시적 짜임을 아프게 들춰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 전체로 보아도 이득이다. 어차피 인문학 많이 안 한다. 많이 한 적도 없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모든 학문의 으뜸이었던 철학을 세상이 멸시하는 것에 대해 한탄한 게 1781년이다. 이는 순수학문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대중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그래서 오히려 가치가 있음을 역설한다."(81)

 

대학은 본질적으로 대중의 지향과 어긋나는 집단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대학은 본질과는 반대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안달이다. 학생 충원율, 취업률 등을 높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본질과 다른 길을 가다보면 끊임없는 장애물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대학생도 마찬가지다. 졸업장을 얻기 위한 대학에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수강신청을 앞두고 대학 커뮤니티에는 강의 후기를 부탁하는 글이 많이 올라온다. (중략) 학생들은 객관식, 단답형, 약술형으로 평가하는 강의를 찾는다. 이때 동반되는 설명이 기막히다. ‘외운 것만으로 정직하게 점수를 받는’ ‘노력한 만큼 성과가 보장되는강의라는 것이다. 아니 그럼 논술형 시험은 사기꾼이 채점한다는 말인가?"(207)

 

나는 대학원 박사과정 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다. 대학에 진학할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올 필요가 없는 대학생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직장생활을 원하는 이가 굳이 대학에 와서 생고생을 하고 있으니 객관식, 단답형, 약술형으로 평가하는 강의를 찾을 밖에.

 

장기나 바둑으로 치자면 외통수다. 대학생은 별 다른 수가 보이지 않으니 남들이 하는 거라도 하고 있을 뿐이다. 정부가 나서서 중재해주면 얼마나 좋은가. 정부는 나 몰라라 하고, 기업은 얼씨구나 쾌재를 부르며 높은 스펙을 요구한다. 여기에다 각종 스펙을 제공하는 여러 업체가 끼어들어 대학생을 착취한다. 대학생은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부모가 건네준 큰돈을 주고 백화점에 드디어 입성했을 때 무엇을 사야 할까? (중략) 지식 백화점에서는 취업시장에서 교환가치가 높은 실용적 지식을 사야 한다."(173)

 

현재 대학생의 대부분은 사실 대학생이 아니다. 대학 졸업생이라는 명함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요즘 대학생이 영어에 집착하고, 효율성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정치 이야기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내 돈 내고 졸업장 따러 간 것이지 지성의 전당에 한 수 배우러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금을 지불하고 가장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려고 고군분투하는 작금의 대학생 아닌 대학생에게 누가 침을 뱉을 수 있나. 그런 의미에서 요즘 대학에 다니는 학생에게 민주주의가 훼손당한 사건에는 무관심하지만, ‘너 요즘 살찐 것 같아라는 말 한마디에는 깜짝 놀라 즉시 운동과 다이어트를 시작한다(247)”고 지적하기에는 성급하다.

 

다시 대학이다

 

<진격의 대학교>의 논의는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비판의 화살은 대학이 아니라 정부에게 겨눠야 한다. 당연히 지켜야할 의무는 방기한 채 대학에게 모든 것을 미뤄놓은 것을 지적해야 한다. 대학의 본질을 해치는 대학 아닌 대학을 내버려두는 것에 일갈해야 한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앞서 말했듯이 대학의 본질은 어긋남에 있다. 현실에 영합하는 대학은 대학이 아니다. 끊임없는 어긋남을 추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관이다. 대학의 지향은 미래를 향해 있고, 현재와의 어긋남에서 미래로 향하는 동력을 얻는다. 또한 어긋남 속에서 새로운 것이 튀어나온다. 대학은 어긋남을 통해 세계를 퇴행이 아닌 진보로 이끄는 공적기관이다.

 

대부분의 잘못은 초심을 잃은 데서 온다. 새로운 제도는 모두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중에 탄생한다. 그러한 제도가 사회에 정착하고 오랫동안 운영되다보면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곪아터질 때까지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조기에 발견해 문제점을 걷어내고, 최초의 취지에 벗어나지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은 시장의 편협한 명령에 항복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공적 기관이다."(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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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목 - 진격의 대학교

  지은이 - 오찬호

  출판사 - 문학동네

  출간일 - 2015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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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고리원전 1호기 폐로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접했다. 후쿠시마 사태처럼 만약 고리원전에 문제가 생길 경우, 피해반경에 속하는 양산에 살고 있는 나로썬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다. 지난한 싸움 끝에 드디어 탈핵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기사를 끝까지 읽어보니 헛웃음부터 나왔다. 폐로를 결정한 이유가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폐로결정 사유에는 탈핵은커녕 경제논리만 가득했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에너지위원회 논의결과 브리핑에서 폐로산업을 키우기 위해 (고리원전 1호기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2030년 이후 가시화될 가능성이 있는 세계 원전 해체시장의 본격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고 했단다. 다시 말하면 고리원전 1호기 폐로 결정에 있어 탈핵의 의미는 없었다는 것이다.

 

지근거리인 일본에서 후쿠시마 사태가 벌어진지 채 5년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민의 안전이 최우선이어야 할 정부부처에서 경제성을 폐로 결정의 최우선으로 내세웠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야기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테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빈약한 국민적 압박이라고 생각한다. 탈핵에 호응하는 거센 국민적 압박 없이 정부를 움직이기란 힘든 일이다. 탈핵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기 위한 홍보가 절실하다.

 

이러한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탈핵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탈바꿈 프로젝트다. ‘탈핵으로 바꾸고 꿈꾸는 세상이라는 의미를 담은 탈바꿈 프로젝트는 핵발전의 위험성과 탈핵의 가치를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탈핵이라는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까지 담아 하나의 책으로 엮었다. <탈바꿈>이라는 책이다.


<탈바꿈>, 책표지 ⓒ오마이북

 

핵발전=값싼 에너지? 결단코 아냐

 

나는 지금까지 핵발전은 수력 또는 화력발전에 비해 값싼 에너지라고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이렇게 배웠고, 주변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뿐만 아니라 내게 핵발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에너지였다. 텔레비전의 공익광고에서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철썩 같은 믿음이 후쿠시마 사태 이후, 완전히 깨져버렸다.

 

값싼 에너지와 친환경 에너지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던 핵발전소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핵발전은 본래 값비싼 에너지환경에 유해한 에너지였다. 정부가 그동안 값싼 에너지라고 홍보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핵발전소 가동 중단 시 해체 비용과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 비용 등 사후 처리 비용이 빠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관련사고 발생 시 드는 천문학적인 처리비용도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핵발전소는 다른 발전소와는 달리 사후 처리 비용이 막대하다. 우리나라는 이제야 경주에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리장(방폐장)이 지어졌다. 하지만 핵발전 이후 나오는 폐연료봉을 처리하는 고준위 방폐장은 아직 공론화조차 안됐다. 여론수렴에서 시작해 방폐장 건설까지 이르는 데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실제로 후쿠시마 지역은 쓰나미 등에 의한 직접적인 사망자보다 핵발전소 사고가 영향을 준 간접 사망자가 더 많습니다. 힘든 피난 생활로 질병을 얻거나 절망감을 느낀 후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부 및 이권을 챙기려는 쪽에서는 다양한 이류를 대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핵발전소의 재가동과 이권 구조 회복을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33)

 

또한 안전사고 처리비용은 어떤가. 체르노빌부터 후쿠시마까지, 핵발전소는 한 번 사고가 터지면 주변은 폐허가 된다. 만약 사고가 발생했을 때 드는 복구비용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금액일 것이다. 정부가 이에 대비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전력생산 비용만으로 값싼 에너지라고 칭하기에는 어불성설이다.

 

차별을 조장하는 에너지

 

핵발전은 정의롭지 못한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에너지를 가장 적게 쓰는 지역과 사람들이 오히려 가장 큰 희생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라늄 채굴 지역에서는 대대손손 그 땅에서 살아온 주민들이 강제로 쫓겨나고 암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핵발전소가 지어지는 바닷가 인근 주민들도 경작지와 어장을 잃고 방사능 오염에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또 희생 속에 만들어진 전기는 대형 초고압 송전탑을 통해 에너지 소비가 많은 대도시와 대공장으로 보내집니다. 그 과정에서 산림을 비롯한 논밭이 훼손되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전자파의 위협에 노출됩니다. 그러나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대도시 사람들은 해당 지역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환경 파괴, 주민들의 의생을 잘 알지 못합니다.”(181-182)

 

우리나라 핵발전소는 모두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동해안(고리, 월성, 울진)19기가 있고 서해안(영광)6기가 있다. 부산을 제외한다면 모두 우리나라 주요 도시와 상대적으로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핵발전이 안전하다면 왜 서울 인근에 짓지 않을까. 대부분의 전기를 수도권에서 소비하는 데, 왜 생산은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이뤄져야 하는지 의문이다.

 

핵발전소가 생산한 전기를 보내려면 대형 초고압 송전탑이 필요하다. 핵발전소가 외곽에 있기 때문에 대도시까지 가려면 많은 송전탑이 지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송전탑 부지로 선정된 주민들은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밀양 송전탑 사건이다. 왜 핵발전소의 전기 송전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이 생겨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핵발전소는 인근 주민의 암 발병률을 높인다. 지난해 10, 부산에서 갑상선암의 경우 원전 주변지역에서 발병률이 높고 갑상선과 방사능 노출과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논문 등이 발표됐기 때문에 피고의 책임이 인정된다1심 재판부의 판결이 나와 주목받은 바 있다. 왜 다른 곳의 전기 공급 때문에 핵발전소 인근 주민이 고통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저당 잡은 미래를 돌려주자

 

지금 핵발전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쥔 사람들은 어른들이고, 청소년들은 결정권도 발언권도 없고 의견을 낼 수도 없습니다. 분명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갈 것이고 더 많은 시간을 핵발전소, 핵쓰레기와 함께 보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216)

 

앞서 언급했듯이 핵발전은 사후 처리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미래를 담보로 줄기차게 전기를 써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래 세대는 우리가 아무 대책 없이 싸놓은 핵폐기물을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과거 수많은 전쟁이 있었을 때, 청년들은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어른임에도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왜 청년인가?”라며 비토(veto)했다. 핵발전소 건설 결정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겠다. “핵발전소 건설을 결정하는 것은 어른임에도 핵폐기물을 감당하는 것은 왜 청년인가?”라고 말이다.

 

우리는 모든 결정에 있어 다음세대를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소모해버리면 다음세대는 그만큼의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탈핵을 위한 실천을 시작해야 한다. 고리원전 1호기 폐로가 탈핵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폐로의 논리가 경제성이 아니라 탈핵이 되도록 끝까지 압박해야 한다. 탈바꿈, 꿈이 현실이 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탈핵을 위한 실천은 아주 사소한 일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알려야 합니다.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해야 합니다.”(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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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목 - 탈바꿈(탈핵으로 바꾸고 꿈꾸는 세상)

  엮은이 - 탈바꿈프로젝트

  출판사 - 오마이북

  출간일 - 2014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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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서양인이야.”

 

학부 시절 들었던 어떤 강의에서 교수가 한 말이다. 괴짜로 소문난 교수였기에 그때는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국인은 한국인이지, 어떻게 서양인일 수 있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한국인은 서양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근대 이후 철저하게 서양화됐다.(지금의 나로서는 과거가 어땠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서양인의 체계로 사유한다. 미적 기준도 서양인의 것을 따른다. 백인을 선망한다. 백인에게서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동남아계나 흑인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 적 없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도, 위해를 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서양에서 설정한 잣대로 민족의 우열을 나누는 것이 가장 미개한 짓이다. 이를 식민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은 아직 식민성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낀 반주변부 국가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츠 파농이 호출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파농은 탈식민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파농>, 책표지 ⓒ한길사

 

파농, 탈식민화의 아이콘

 

내가 파농과 마주친 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구입하게 되면서였다. 하지만 첫 만남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앞부분만 읽다 포기한 것이다. 이후 한길사의 인문고전 깊이읽기시리즈로 출간된 <파농>을 접하면서 파농이 어떤 인물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도 말이다.

 

프란츠 파농은 1925년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마르티니크는 1946년 프랑스 행정구역으로 편입됐다.) 파농은 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터라 프랑스어를 배우고 프랑스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 파농은 프랑스를 자신의 조국이라 여기며 동경했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 참전한 전쟁터에서 받은 냉대와 네그리튀드라는 흑인정체성 회복운동의 세례를 받은 이후 파농은 180도 변했다.

 

사고의 대전환 이후 파농은 탈식민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서양의 다양한 사상을 전유(專有)해 탈식민화에 관한 자신만의 사상을 정립한다. 파농은 사상 정립에서 그치지 않았다. 정치적 행동도 불사했다. 자신이 알제리인이 아님에도 알제리 독립운동에 투신해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파농의 굴곡진 삶은 그를 더욱 특별하게 한다.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 태생으로서 식민모국인 프랑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향유했던 경험과 탈식민화를 위한 학문적·정치적 투쟁의 경험이 공존하는 파농의 삶은 그의 사상이 이상적인 탁상공론이 아니라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실천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은 이 같은 파농의 삶과 사상에서 식민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에서 파농이 필요한 이유

 

"누더기든 최신 유행 스타일이든 그들은 무조건 유럽식 의상을 걸친다. 그들은 유럽 가구를 사용하고 유럽식 사회담론을 구사하며, 모국어를 유럽식 표현으로 윤색할뿐더러 유럽 언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면 과장된 수사를 남발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유럽과 유럽인이 이룩한 업적과 대등한 위치로 상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21)

 

1920년대 마르티니크의 니그로와 2000년대 한국인은 매우 유사하다. 마르티니크의 니그로가 유럽 문화를 선망하고 그것에 집착했듯이 한국인도 마찬가지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유럽을 미국으로 바꾸면 현재 한국 상황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정치, 사회, 문화, 학계 등 미국 문화의 세례를 받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마르티니크 니그로와 한국인의 유럽과 미국 선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와 관련된 행태들이다. 언어는 일종의 권력이다. 마르티니크 니그로에게 프랑스어가, 한국인에게는 영어가 상류 계층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로 작동했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원어민 수준의 영어발음을 위해 혀 수술까지 감행하는 촌극이 벌어지겠는가.

 

파농은 이처럼 스스로 타자가 되어 자신을 불안정한 위치에 갖다놓고 항상 전전긍긍하며 버림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모습이 일종의 포기신경증에 해당하며 그것의 근본원인은 자기타자화 또는 자기소외라고 진단한다. 이 증상은 신비롭게 여겨지는 집단[백인]에서 인정받고 거기에 편입되려는몸부림인 동시에, “자신의 개체성으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141쪽)


파농의 신랄한 비판이 진정성을 띠는 것은 파농 스스로 니그로의 자기소외에 빠져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파농은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쓴 자신이 결국 니그로였음을 인식했다. 파농의 자기반성은 이후 알제리 독립운동과 같은 탈식민화 정치투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파농처럼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식민성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알제리의 해방과 아프리카의 탈식민화라는 지상과제(54)”를 위해 평생을 바친 파농은 갑작스레 찾아든 백혈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하지만 파농의 사상은 독일의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 일본의 좌익학생운동, 라틴아메리카의 반미운동, 1979년 이란혁명 등(65)”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파농은 지금의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마르티니크처럼 한국도 식민지를 경험했다. 뿐만 아니라 파농이 스스로 경험했듯이 한국도 서양을 동경하고 제3세계를 경멸한다


이러한 경향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에서도 드러난다. 1등이 아니면 모두가 패배자라는 인식은 서양을 선망하고 제3세계를 경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처럼 한국은 자신이 과거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다.

 

파농이 맹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이 내면화한 식민성을 걷어냈듯, 우리도 깊은 성찰과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진국을 선망했지만 수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다. ‘금수저를 물기 선망했지만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끊긴지 오래다. 위를 선망해서 얻은 것이라곤 결국 모멸감과 자기비하뿐이다. 우리는 이를 자각해야 한다. 파농이 그랬듯, 변혁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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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목 - 파농(인문고전 깊이읽기 18)

  지은이 - 이경원

  출판사 - 한길사

  출간일 - 2015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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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5.08.12 19:4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서평 잘 읽고가요. 요즘 글이 자주 보이니 너무 좋네요.
    글도 훨씬 더 풍성해진듯하구요. 그만큼 성숙?해진거죠?
    무더운 여름날이 이제 금새 지나갈듯해요.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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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터라 종종 서점엘 들른다. 한꺼번에 여러 권을 주문하는 버릇이 있어 책을 구입할 때는 주로 인터넷서점을 이용하지만, 집에서 깜빡하고 책을 빠뜨리고 오거나 당장 읽고 싶은 책이 생길 때는 일부러 시간을 내 서점엘 들른다. 서점에 들어서면 광활하게 진열돼 있는 책의 바다가 내 마음을 상쾌하게 만든다.

 

인문사회 관련 책에 관심이 있어 그런지 발걸음은 자동적으로 인문사회 쪽 진열대로 향한다. 진열대 위에 누워있는 책들을 이리저리 훑다보면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많이 띈다. , 생각, 희망, 이미지, 관찰, 광고, 엄마 등등. 인문학이 붙지 않은 제목을 찾기 힘들 정도다. 서점의 사방팔방이 인문학으로 가득하다.

 

제목에 많이 쓰인다는 건 그만큼 인문학이란 단어가 판매량에 어느 정도 기여한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마케팅 수단으로써의 인문학이 남발될수록 인문학 본연의 의미는 점점 퇴색되고 만다. 이원석 작가는 <인문학 페티시즘>이란 책을 통해 인문학 아닌 인문학이 판치는 세태를 비판한다.


<인문학 페티시즘>, 책표지 ⓒ필로소픽

 

인문학 페티시즘

 

지금 한국의 인문학적 상황은 어떠한가? 실로 활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에나 인문학이 넘실대고, 누구라도 인문교양을 주목한다. 당장 사회의 음지에서는 인문고전을 손에 들고 숱한 독서 멘토, 인문 멘토들이 찾아간다. (중략) 마치 인문학이 이제 한반도를 점거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9)

 

마치 인문학이 한반도를 점거하고 있는 듯하다며 약간의 과장을 섞인 했지만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다. 실제로 인문학을 표방하지만, 인문학보다는 시류에 편승해 오로지 판매만을 목적으로 하는 수준 이하의 책들이 출판시장을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진짜인문학은 진짜라는 수사를 붙여야할 정도로 더럽혀졌다.

 

저자는 이러한 도구 혹은 장식이 되어버린 인문학에 대한 열광(18)”을 가리켜 인문학 페티시즘이라고 명명한다. 페티시즘은 물신 숭배라는 뜻으로 특정 사물에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그것을 숭배하는 일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를 차용해 인문학에 신적인 속성을 부여하고 숭배하며, 인문학이 자기계발의 도구가 된 현실을 명쾌하게 짚어낸다.


인문학 시장의 아이돌 강신주

 

"강신주는 전통적 철학자와 텔레비전에 나오는 자기계발 강사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하고 있다. (중략) 사실 지금 그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철학적 상담이라기보다 철학적 자기계발이 아닐까?"(45)

 

<인문학 페티시즘>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인 강신주를 소위 저격하고 있어서였다. 돌직구 철학자로 불리는 강신주는 책을 냈다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요컨대 강신주 자체가 베스트셀러인 작가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모자라서 강연을 못할 정도로 전국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는 강연 부자다. 철학자면서 대중성까지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성공했다고 해서 마냥 강신주의 방식을 상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신주의 책과 강신주가 출연하는 팟캐스트 등을 즐겨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답이라고 판단한 바를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내리찍는 화법에 질려 등을 돌렸다. 철학은 정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를 성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여러 갈래의 길을 터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가지 길을 정해 그곳으로 가라고 등 떠미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강신주는 일종의 도깨비방망이다. 돌직구로 그것을 내리치면 정답이 툭 하고 튀어나온다. 반면 자기성찰은 상당한 노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의지를 동원해야 하는 능동적인 행위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어릴 때부터 수동적인 생활을 강요당해왔다. ‘이렇게 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정답지를 받아 외우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강신주가 내리치는 도깨비방망이에 환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돈벌이로 전락한 인문학

 

분명 자기계발서인데도 겉에 인문학을 두르고 있는 책이 있다. 저자는 인문학으로 둔갑한 자기계발서를 쓴 대표적인 인물로 이지성을 꼽는다. 이지성은 ‘R=VD’라는 공식을 설파한 책 <꿈꾸는 다락방>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그런데 생생하게 꿈꾸면 이뤄진다는 신비주의적 내용을 다루던 이지성은 급작스럽게 종목을 인문고전으로 바꾼다. 인문고전을 다룬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인문고전과 성공학을 교모하게 결합한 이 책은 소위 대박을 쳤다. 시류를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해야 할까. 최근에는 <생각하는 인문학>이란 책을 냈다. 인문학이 범람하는 현 세태를 정확하게 읽었는지 제목에 인문학을 박아놓았다. 이 책 역시 현재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자기계발 작가들이 생존과 성공의 수단으로 인문학을 활용하는 현실은 실로 개탄스럽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인문학이며, 그들이 참된 인문학도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보다 이렇게 인문학을 활용해서 정말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지는 더욱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반짝인다고 모두 금은 아니다.”(127)

 

이 같은 모습은 인문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밀접한 독서와 글쓰기 쪽에서도 발견된다. 몇 년 안에 수백수천 권의 책을 읽기만 하면 성공한다거나, 자신에게 글쓰기를 배우면 베스트셀러 작가로 떼돈을 벌 수 있다고 속삭이는 책들이 난무한다. 인문학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자기계발서가 호시탐탐 독자의 지갑을 노리고 있다.

 

인문학의 본령을 향해

 

문학평론가 김현은 <한국문학의 위상>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하느냐는 질문에 답한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고 말이다.

 

김현의 말을 풀이하자면 이렇다. 문학은 쓸모없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이 욕망하는 대상(단적인 예로 돈을 들 수 있다.)은 그 대상을 욕망하면 할수록 인간을 억압한다. 쓸모에서 자유로운 문학은 인간이 욕망하는 대상이 도리어 인간을 억압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의 본령도 여기에 있다. 인문학이 인문학이 아닌 시대다. 다시 한 번 김현의 답을 곱씹을 때다.

 

PS.

저자는 <거대한 사기극>이란 책으로 자기계발서가 횡행하는 현 사회를 제대로 꼬집었다. <인문학 페티시즘> 역시 비판할 만한 현 세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시종일관 밀어붙이는 투의 문체, 매끄럽지 못한 문장, 무성의한 편집은 책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글의 신뢰성까지 무너뜨린다. <거대한 사기극>에서 보여준 깊이와 통찰이 <인문학 페티시즘>에서는 보이지 않아 아쉽다. 이를 본문에 남기기엔 저자의 본의를 해칠 것 같아 글 말미에 남긴다.


 

 

책 정보(책 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인문학 페티시즘

  글쓴이 - 이원석

  출판사 - 필로소픽

  출간일 - 2015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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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04 16:39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5.08.06 22:27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오..인문학..참 많이 이야기 되기는 하는데.. 제가 긍정하는건 '사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여요. 자본주의사회에서 그 모든것이 다 상품이 되는 세상이니..인문학이라고 뭐 다르겠나 싶어요. 아마, 인문학뿐만아니라 이사회의 모든것이 '돈'에서 자유롭고, '돈'을 섬기지않으면서 오로지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쓰여지는 것이 있다면(존재한다면), 그것은 유일무이한 '희망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무튼, 강신주 책은 아주 좋게 읽었는데.. 강연방식은 아닌가보네요. 질려버렸다는 분이 계시긴했어요. 제가 참 의아해했는데..
    책에서는 보여지지않는 그런태도가 존재하는 게..정말 놀랍네요. 그건.. 그간 읽었던 책에 대해서도 갑자기 의문이 생기네..ㅠㅠ
    물론, 얼마전 무슨 그림을 놓구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꼭 보고 위로받았으면 한다고 아침방송에 나와서 이야기할때..제가 너무 놀랬거든요.
    아니.. 비정규직노동자가 '그림'을 안봐서 위로를 못받는게 아니잖아요? .. 제가 참 갸우뚱..했었던..그런 사건이였는데..

    아무튼.. 책이 다양한 지적을 했는데..상당히 거칠었나보군요. 아무튼.. '돈'이 신으로 우리에게 존재하고 신으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가지게 하는 사회에 사는한.. 그 범위를 뛰어넘으며 혹은 거부하며 사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힘들고 고단한 삶이겠지만..어찌보면 가장 행복한 것을 찾아 가는 사람일꺼여요.

    우아~ 말 길게썼당..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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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익숙함으로 가득하다. 일상 속에 포함된 공간, 인물, 상황 등은 뻔하다. 한 번씩 색다른 일이 벌어지곤 하지만 그뿐이다. 떠돌이로 살지 않는 이상,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일상이다. 어쩌면 떠돌이 생활도 일상으로 고착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상의 중력은 강력하다. 하지만 강력한 중력만큼 벗어나려는 마음도 비례한다. 일종의 관성이랄까.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의 저자도 일상에 질려버렸을 것이다. 강하게 짓누르는 일상의 중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를 통해 호주로 훌쩍 떠난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수중에 돈이 없는 저자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또 다른 일상에 불과했다. 이 책은 저자의 일상탈출기이자 일상체험기이다.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 책표지 ⓒ후마니타스


환상과 현실 사이

 

  

낯섦은 환상을 동반한다. 낯섦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우리는 그 구멍을 환상이라는 것으로 메운다. 다른 나라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최근 국외여행이 보편화됐다고는 하지만, 여행은 여행일 뿐 직접 그곳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대부분은 일상을 여행으로 착각한다. 때문에 막상 일상이 닥쳐왔을 때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저자도 마찬가지였다. “워킹홀리데이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장기 여행이라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22)”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앞으로 겪을 노동은 호주를 여행하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은 일터에서 겪을 호주인과의 아름다운 교류 또는 호주에서 벌어질 환상적인 여행만이 존재했다.

 

환상과 현실의 간극은 상당히 컸다. 몸을 누일 숙소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생활을 위한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것까지.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바로 자신을 비롯한 속칭 워킹이라 불리는 이들이 호주 사회에서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워킹이 입국해서 일자리를 구하고 일을 하고 시급을 받는 모든 과정은 그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일을 시작할 때 근로계약서를 쓰지도 않고, 가게 주인들은 사람을 고용했다는 신고를 세무서에 하지도 않는다. (중략) 최저임금 절반의 시급, 규정보다 훨씬 긴 노동시간, 식사 시간이나 휴식 시간이 없는 환경,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이런 관행들은 직접 일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다.(47~48)”

 

워킹홀리데이 비자 발급과 함께 받은 세금 신고 번호를 직접 사용할 일이 없음(47)”을 목격하면서 저자는 본격적으로 워킹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순탄하지는 않다. 차이나타운, 주스 가게, 햄버거 집, 쇼핑센터의 초밥 가게 등을 전전한다. 하지만 단순노동은 사람을 쉽게 일하는 기계로 전락시켜버린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보트가 떠다니고 하늘은 늘 청명하게 높은 시드니에서 밤새 일하고 돌아오는 귀가 길에 하루 종일 손이 물에 닿아 불어버린 손톱(116)”을 봐야하는 괴리감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저자는 도시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농장으로 떠난다. 하지만 농장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워킹이란 존재는 호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용해먹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워킹을 싼값에 부려먹거나 임금을 체불하는 일은 빈번하다. 호주에 사는 교민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가장 등쳐 먹는다는 말이 공공연한 세상이다. 책에도 언급하는 것처럼 일자리를 알선하면서 높은 수수료와 체재비를 요구하는 것은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일이다.

 

워킹이라는 허울뿐인 이름

 

경찰에게 돈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한 한국 사람들이나, 경찰에 들킬까 봐 숙소로 돌아가 버린 네팔 사람들이나, 경찰들 앞에서 우리는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최저임금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돈을 받고, 하루 종일 일하면 그만인 사람들이었다. (중략) 경찰들을 보면서 나는 이것이 호주가 우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온 사람들을, 이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219)”

 

워킹홀리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제도는 호주의 이주 노동자 충원 제도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목격했을 때 호주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접는다. 호주나 한국이나. 서로 다를 것은 없었다. 차라리, 국민과 외국인 사이에 끼인 워킹이라는 존재보다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게 좀 더 나은 일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저자가 워킹홀리데이 제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씌어 있는 미지의 세계, 청춘의 열정으로 가득한 야생의 세계, 그러면서도 서양의 문물을 간직한 선진적 세계(228)”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워킹 생활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환상은 현실을 살아내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꿈을 꾼다. 하지만 꿈만으로는 부족하다. 또 영어만을 바라보고 1년 이상을 허비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저자가 워킹 경험 속에서 맞닥뜨린 보이지 않는 것(231)”을 직면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식당 설거지 담당, 새벽의 건물 청소부, 농장 노동자 등등. 은폐되어 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는 순간 저자가 이 책을 세상에 내보인 것처럼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참혹하고, 희망은 요원할 뿐이다.

 

 

 

책 정보(책 표지를 클릭하세요)


  

  책제목 -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

  글쓴이 - 정진아

  출판사 - 후마니타스

  출간일 - 2015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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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2 16:31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5.07.22 23:01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사실 웬만한 영어실력을 한국에서 착실히 쌓고 외국으로 가는 게 아니면 외국에서 1년 남짓 산다고 영어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지는 않아요. 주위에서도 그런 사람들 많이 봤고 저만 해도... 그러니 대부분의 경우에 영어를 빌미로 착취 당할 수밖에 없는 거죠...

  3.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5.07.23 23:24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우리나라만 하겠나..싶어요. (우리나라가 더 심하다는 뜻임.)
    잘 읽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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