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지금껏 여러 선거에 참여했지만, 선거철만 되면 기묘함을 느낀다. 평소엔 문자 한 통 없었던 사람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문자를 보내오고, 텔레비전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 눈앞에서 명함을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흙수저라 불리는 비루한 인생이 권력자만의 기분을 맛볼 수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나와 같은 유권자들이 선거철에만 도래하는 기묘한 아이러니의 충격을 맛보고 있을 때, 선거에 출마하는 각 후보자들은 어떻게 하면 유권자들의 표를 얻을 수 있을까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이다. 매일 출퇴근 시간에 명함을 돌리며 인사를 하면 될까, 전통시장에 찾아가서 먹방을 찍으면 될까, 문자를 수천수백 통 보내면 될까하고 말이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유권자의 한 표는 매우 큰 힘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표만으로 선거에서 이길 수는 없다.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읽으려 애쓴다. 이를 읽지 못하면 선거운동기간 내내 헛발질만 하다 낙선하고 만다. 표심을 알기 위해 안달하고 있을 후보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바로 󰡔표심의 역습󰡕(책담, 2016)이란 책이다.

 

󰡔표심의 역습󰡕새로 그리는 대한민국 유권자 지도라는 주제로 내일신문사와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팀이 기획하고 한국리서치가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쓰였다. 한국 정치 지형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네 가지 키워드인 세대, 지역, 계층, 이념을 매개로 전체적인 한국 유권자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세간에 통용되는 기존의 통념과 다른 점이 많아 흥미롭다.

 

정치꾼이 문제다

 

기존의 통념과 다른 부분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역주의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한국의 정치지형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지역주의다. 예컨대 영남은 새누리당의 텃밭이며, 호남은 더불어민주당의 텃밭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은 영호남의 지역주의 때문이라고 힐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표심의 역습󰡕은 이를 부정한다.

 

󰡔표심의 역습󰡕지역주의의 원인에 대한 지역 유권자들의 인식에 관한 여론조사(본문 125)를 실시했다. 이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역 유권자들은 지역주의의 원인을 정치지도자들이 지역감정 조장으로 꼽았다. 다른 항목인 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 특정 지역민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 공직 인사에서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 혹은 특혜 등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쉬운 공식이 바로 네트워크에 기대는 것이다. 예컨대 해당 지역에 살지도 않으면서 선거철만 되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OO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을 보라. 혈연, 학연, 지연 등 온갖 네트워크를 통해 선거 운동을 하는 것은 이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각 지역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면면만 봐도 그 지역 출신이 아닌 경우는 드물다. 요컨대 지역주의는 유권자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인의 필요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의 일을 생각한다고 영국의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는 말했다. 이 말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내가 보기에 한국 정치인 다수는 정치꾼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책으로 유권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무리 지난한 일이라 하지만, 선거의 당선을 위해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과연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이라 할 수 있는가. 지역주의에 호응하는 유권자의 문제도 분명 존재하지만, 지역주의를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하는 정치꾼이 더 문제다.

 

정당정치의 부재

 

또 놀라웠던 것은 한국 유권자들의 70% 정도가 지지정당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타의 여론조사를 보면 어떤 법칙이 있는 것 마냥 유권자들의 지지정당 비율이 정해져 있어 보였는데 말이다. 󰡔표심의 역습󰡕에 따르면 이는 여론조사 방법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응답자는 주어진 응답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지지정당이 없다는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면 응답자들은 제시된 정당 중 하나를 택하려 한다(본문 292)”는 것이다.

 

한국 유권자의 다수가 지지정당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당정치의 부재에 원인이 있다. 한국 정치에 정당정치가 부재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선거제도의 문제 때문이다. 소수 정당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하나도 없는 소선거구제+다수대표제에서 정당에게 선명함을 요구하는 것은 스스로 죽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정당은 확장성을 위해 모호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여러 이념이 섞인 이상한 연합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다수대표제 하에서 정치인은 위대한 신념만으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 당선을 위해 표를 하나라도 더 긁어모으려 앞서 언급한 네트워크를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정치 지형에서 정치가를 꿈꾸며 국회에 입성했던 정치인이 정치꾼으로 바뀌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정당을 신뢰하지 못하며, 자신을 제대로 대변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악순환이다.

 

다음 세대의 일을 생각하는 선거

 

정치인이 정치꾼으로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정치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 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유권자들만이 가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다음 세대의 일을 생각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것, 다시 말해 유권자 자신들의 표심이 다음 세대의 일을 생각하는 정치인에게 있다 주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64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혈연, 학연, 지연 등 네트워크에 호응하는 선거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일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고민하는 선거가 되길 바란다. 2016413일 이후가 좀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될지, 좀 더 나쁜 대한민국이 될지 알 수 없지만 표심의 방향이 정치꾼의 호응이 아니라 유권자의 주체적인 의견 표명으로 조금이나마 바뀐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그 조금의 변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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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6.03.31 20:14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잘 지내고 있죠? 봄날이라 몸이 많이 나른해요. 몸관리 잘하구요.
    글이 점점 더 좋아지는 거 같아요.

    다음세대를 걱정하는 정치인이 있는가..싶은거여요. 아무튼.. 덜 나쁜놈..을 뽑아야죠.
    그래서 사실 서러워요. 아직은 정치는 정치인만들 위한 거같으니깐요. 본래 정치는 나와 우리의 삶을 바꾸는..그런건데..

    아무튼, 한해 1/4이 훌쩍 지나삤네요. 잘 살아내보자구요.

  2. BlogIcon 1466266128 2016.06.19 01:08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잘 읽고 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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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근시를 앓고 있다. 6살 때였나, 한 달 정도 눈병을 앓더니 눈이 급격히 나빠졌다. 가까이서 텔레비전을 보던 습관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때부터였으니 안경과 동고동락한 지도 얼추 25년이 지났다. 25년간 흐릿한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기상 후 초점이 나가 뿌옇게 뭉개진 시야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떠 더듬더듬 안경을 찾는 일은, 우스꽝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숙명이 되어버렸다.

 

안경은 내 삶의 일부다. 만약 안경이 없다면 나는 멀리 있는 어떤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코앞에 있어야만 어떤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삶이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시력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 사회가 보이지 않는 삶, 어느 것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근시 사회라 명명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폴 로버츠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다. 그는 <근시 사회>(민음사, 2016)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근시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안경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 모두가 코앞만 바라보며 현재를 소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래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사회가 어떻게 파괴되어버릴지 모르는 것 마냥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 애쓴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어떤 결과로 치달을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파괴된 공동체, 자아의 극대화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재미있게 보았다. 내가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여주인공의 남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쌍문동 사람들이 형성하고 있던 마을공동체였다. 그들은 이웃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일부러 음식을 많이 했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아이를 이웃에게 맡기고, 마을에 속한 사람이 아프기라도 하면 모두가 병문안을 갔다. 모두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내가 어렸을 적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였지만 옆집 문은 항상 활짝 열려있었고, 나는 그곳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2016, 지금은 어떤가.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나 역시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이웃을 모르니 음식을 나눠줄 일도 없다. 자신의 아이를 만지기라도 하면 학을 떼는 부모가 늘었다. 마을공동체는 파괴되었고, 이제 마을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군집에 불과해졌다.

 

어쩌다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개인을 서로 결속해주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일까. 저자는 이를 자본주의의 문제로 파악한 듯하다. 자본주의는 경제가 끊임없이 성장할 것을 전제로 굴러가는 체제다. 그런데 만약 경제 성장이 멈춘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불안한 미래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확실한 현재를 도모하려 들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일을 팔아 현재를 사는 것이다.

 

과거에는 현재를 팔아 더 나은 미래를 사려했다. 때문에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더라도 그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려 했다. 하지만 1997IMF 사태와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겪은 이후 사회는 경제가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잃어버렸다. 결국 사회는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기보다는 보다 확실한 현재를 착취하기로 결정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욕망 추구를 제어하기 보다는 극단으로 밀어붙여야만 한다. 공동체보다는 개개인의 자아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제 사회는 개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스템을 완벽히 구축한 듯하다. 신이라고도 불리는 구글은 나의 검색 패턴을 분석해 내가 소비할 만한 상품을 광고로 제시한다. 스마트폰을 통하면, 손가락만 몇 번 놀렸을 뿐인데도 쉽게 내가 원하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개개인의 정치성향을 파악하고 개개인이 관심 가질만한 공약과 정책을 선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개인의 욕망 추구가 쉬웠던 때가 있었던가.

 

근시안적인 기업과 사회

 

기업과 사회는 현실을 착취하기 위해 근시안적으로 철저히 변했다. 책은 미국 사회를 예로 들고 있지만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기술에 투자해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기보다 인건비 절감을 통한 이윤 추구를 선택했다. 이를 위해 쉽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통과시키려 안달하는 노동개혁 5대 법안도 같은 선상에 있다.

 

기업에서 인력을 채용하려할 때 경력직을 선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규인력을 채용해 교육하는 시간과 비용이 아까운 것이다. 청년실업률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경력을 쌓을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취업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에서 청년들이 살아갈 희망은 없다. ‘헬조선이니 망한민국이니 하는 말들이 청년들 사이에서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건강을 책임지는 의료 관련 산업은 어떤가. 앞서 언급한 노동개혁 5대 법안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가 통과시키려 애를 쓰고 있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의료산업이 영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법이다. 만약 의료산업이 영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건강보다 의료 서비스나 약의 매출이 우선시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는 드물다. 정치꾼만 득시글거린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기보다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자신이 속한 당의 공천을 받으려 애쓴다. 다음 선거에 이기기 위해 온갖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이 같은 사회에서 과연 미래를 찾을 수 있을까.

 

공동체의 회복을 위하여

 

미래의 암울한 전망은 장밋빛으로 변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는 근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잃어버린 공동체의 회복을 주장한다. 개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길 멈추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자고 요청한다. 그런데 저자의 요청에 응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궁금하다.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의 사람들은 지금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것이라 자조(自嘲)하는 데 자신의 심력을 소모하고 있을 뿐이다. 안경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한줄기 기대를 거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룬 경험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아름다웠던 공동체를 우리가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욕망을 유보하고,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한 공동체를 꾸리려는 시도 자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저자가 책 말미에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다음 용기를 내야 한다.

 

남들을 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이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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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4시간, 1440, 86400. ‘시간은 인간이 평등하다고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다. 소유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만은 결코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모두 하루 24시간의 지배 하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노오력을 신봉하는 자들의 도구로 종종 사용되곤 한다.

 

정말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일까. 24시간, 1440, 86400, ‘시간이란 수사로 추상화된 삶은 인간 모두에게 평등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각자의 시간이 자본에 의해 노예화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시간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주장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

 

대학생을 예로 들어보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든든한 뒷배가 있는 대학생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대학생은 불안한 생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만 한다. 밤늦게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며 공부하는 대학생과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대학생이 과연 같은 시간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대학생뿐만이 아니다. 모두 각자 자신의 시간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간다. 별다른 의문 없이, 돈 없는 것을 자조하며 주인의 핍박을 견디며 살아간다. 돈 없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시간조차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삶을 우리는 그저 견디며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2012년 겨울,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는 그저 망상일 뿐일까.

 

저당 잡힌 시간, 소진되는 삶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코난북스, 2015)는 그동안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시간문제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책은 시간문제가 단지 시간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노동체제, 부채, 디지털화, 부동산, 사교육 등 사회 전반의 것들과 긴밀히 연계돼 우리의 삶을 소진시킨다고 폭로한다.

 

먼저 부채와 시간의 관계를 살펴보자. 한국 사회는 현재 빚잔치를 연일 벌이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가계부채는 1166조 원에 달한다. 그럼에도 빚내서 집사라는 언설이 난무한다. 부동산뿐인가. 대학생 중 태반은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을 안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 사회에 나와도 일자리는 없고, 빚 갚을 길은 요원하다.

 

빚은 미래에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믿음을 화폐로 교환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래를 담보로 돈을 빌린 것이다. 이는 미래를 되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시간으로 강제된다. 금융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미래는 신용등급 일람표와 부채의 규모가 설계”(37)하는 것이다.

 

갚아야할 부채가 얼마 남았고, 더 빌릴 수 있는 여지가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미래의 시간 앞에 놓인 개인은 미래가 안정적이길 바란다. 미래가 예상을 벗어난 모험의 시간이 되기보다는 연체 없는 분할 납부가 가능한 시간이길 희망한다. 그러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개인의 현재는 더욱 제약될 수밖에 없다.”(37)

 

디지털화는 어떤가. 기술발전으로 시스템 대부분이 디지털화된 사회는 표면적으로 시공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전세계가 디지털이라는 기술로 연결돼 있고, 재택근무, 프리랜서 등 새로운 형태의 직업도 생겨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발전은 도리어 개인의 시간을 얽매 주체적인 시간 활용을 가로막는다.

 

언젠가 빨리 파일을 보내라는 상사의 메시지에 1% 남은 배터리를 보며 폰이 죽으면 나도 죽겠지읊조리는 직장인의 모습이 나온 한 TV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과거에는 퇴근하면 직장인은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퇴근이란 단어는 없다. 회사를 벗어나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항시 대기상태에 놓인다.

 

내내 일하지는 않지만 항상 일할 태세가 되어 있기를 요구하는 방식. 이러한 노동 패턴은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 간의 경계를 파괴하고,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의 시간 가운데 어느 부분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이를 특별한 종류의 빈곤으로서 시간의 빈곤이라고 말할 수 있다.”(55)

 

대표적인 예 두 가지만 소개했지만, 시간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다양하다. 공부하기 좋은 나이라며 청소년의 시간을 모두 공부에 쏟아붓도록 만든다. 또 산업재해가 일어나도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작업을 중지하지 못한다. 인건비 절감, 상사의 눈치, 의미 없는 회식 등 강제된 야간 노동도 빈번하다.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나.

 

장시간 노동 체제는 우리의 시간, 가족의 시간을 빨아들여 몸집을 불려 양적 성장 중심의 사회를 지탱했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일하는 기계가 되었고, ‘돈의 노예가 되었다. 이웃과 동료에 연대하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눈감고 오로지 나와 가족의 생존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심성을 갖게 되었다.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내가 살아남으면 된다는 보수적인심성 또한 갖게 되었다.”(120)

 

이는 사람들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는 사회의 문제다. 우리는 이 같은 사회의 행태를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사회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삶을 모두 소진시키기 위해 더욱 가혹한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자는 인식을 깨뜨리고 우리의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찾은 노동계급 자료보관소에서 뜻밖의 자료를 발견한다.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이 남긴 자료에서 저항의 난폭한 표현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노동자들이 선술집에서 형이상학을 논하고 저녁에는 인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자신들만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다룬 자료를 발견한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 자료를 통해 노동자들도 철학과 예술적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노동자들도 철학자나 예술가와 같은 동등한 사람이며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도출해내고, 이를 프롤레타리아의 밤: 19세기 프랑스에서의 노동자의 꿈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정리한다.

 

이 내용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저당 잡은 사회의 은폐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 외에 답이 없다는 뜻이다. 철학과 예술을 통해 사회를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자는 인식을 버리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자. 다음날 노동을 위한 재충전으로 소중한 시간을 버리지 말자.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철학과 예술을 통해 우리의 삶을 한 단계 성숙시키자. 우리는 모두 철학자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자문하자. 우리는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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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용무도(昏庸無道).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는 뜻이다. 현재 대한민국 상황을 꿰뚫어 본 촌철살인의 표현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어지럽고, 인간의 도리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이다. 청년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헬조선이라 비하하며 탈조선하고 싶다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이 미래가 없다고 선언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란 의문을 자주 품게 된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세월호 사건이 있고 난 후부터였다. 아직까지 세월호 사건은 납득할 만한 해결 없이 답보상태다. 1년 뒤 메르스 사태가 터졌다. 세월호 사건 이후 안전을 강조했던 정부의 말은 허망하게 흩어졌고 38명의 애꿎은 목숨만 희생됐다.

 

2016, 새해를 맞이했지만 혼란은 잦아들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 정부가 최종적·불가역적이란 이해하기 힘든 관형사가 붙은 위안부 협상을 타결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못한 협상이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엄마부대라는 요상한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며 이제는 일본을 용서해주자고 피해자를 윽박지르는 이상한 곳이다.

 

대한민국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죄를 해 달라 구걸해야만 하는 곳이다. 대한민국은 피해자는 정부의 위로와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자신들의 요구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협상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곳이다. 대한민국은 사과도 하고 10억 엔이라는 돈도 준다는 데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며 구경꾼들에게 피해자가 타박을 받아야하는 곳이다. 대한민국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무례와 폐륜, 악의 번영

 

도무지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맞닥뜨릴 때면, 밖으로 뛰쳐나가 짱돌을 들 용기가 없는 나는 대신 방구석에 들어가 책을 집어 들곤 한다. 이번엔 <대한민국은 왜?>(사계절, 2015)란 책을 펼쳤다. 유명한 사회학자 김동춘이 쓴 이 책은 큰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수없이 떠올랐던 대한민국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란 질문에 나름대로의 답을 내게 내밀었다.

 

책이 제시한 답의 요지는 아주 간단하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대한민국이라는 옷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올바른 토대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적극적 방조 하에서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성립됐다는 것이다. 시작이 잘못됐다면 이후의 모든 과정도 잘못되리라는 것은 필연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미군정은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을 대부분 활용했다. 기술·행정 관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때문에 민족반역자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이들은 처 들어가 매타작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권력 앞에서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또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인사 대부분이 숙청당했다. 끝내 일제 부역자들의 수장인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의 대통령이 됐다.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터져버렸고, 현재까지도 민주주의를 좀 먹고 있는 반공주의가 대한민국에 도래하고 말았다. 국가에 반하는 모든 것을 빨갱이·종북으로 몰아 처단할 수 있는 절대마법이 권력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이 후진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주는 대신 애국자들의 참담한 말로를 보여주었으며, 예와 덕을 주는 대신 무례와 패륜을 주었고, 선의 선양宣揚보다는 악의 번영을 주었다.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8(재인용, 211)

 

함석헌 선생의 글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무례와 폐륜을 일삼는 자들이 승리하는 곳이다. <베테랑>, <내부자들> 등의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도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승리한 것을 본적이 없는 탓이다.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후손은 떵떵거리며 살아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폐지를 주워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대한민국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기회주의적 행동을 일삼았던 자들이 애국을 논하며 대중에게 왜 애국하지 않느냐며 호통을 치는 곳이다.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이 과연 정도(征途)를 가고자 하겠는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쌓인 적폐(積弊)는 악의 번영을 예찬하고, 정도를 추구하는 이들을 칠푼이 취급하는 사회로 만들어버렸다.

 

자립하지 못하고 주인을 찾아 헤매는 노예 상태

 

조선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종주국을 찾아 헤맸다. 물론 당시 사대(事大)는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필요한 조처였다. 하지만 서구열강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러한 사대 관념은 독으로 작용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물론, 독립보다는 의존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게 만들었다.

 

84일 병합을 위한 비밀협상 자리에서 이완용의 비서이자 신소설 작가인 이인직은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29)

 

구시대적인 사대 관념을 일찍이 타파하고 독자적인 세계관으로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식견이 있었더라면, 이인직이 짓거린 저 따위 망발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대국에 휘둘려 한반도가 남북으로 쪼개지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 정부가 수립됐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단독 정부는 수립됐고 남북은 갈라졌다. 이후 대한민국의 종주국은 미국이 됐다. 이승만은 미국을 철저히 추종했고, 그것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1965년 체결한 한일기본조약도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렇게 졸속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5년의 위안부 협상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교두보로 일본을 낙점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납득하기 힘든 협상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얻는 해방은 한낱 주인을 바꾸어 섬기는 것이요. 형태를 달리한 노예 상황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하는 방향은 일본이 가르쳐준 것이요, 조직된 제도는 첨단적인 미국류의 모방이요, 운영 방식은 이민족을 통치함에 사용한 일제의 방식이니 우리의 문화를 어디서 찾겠는가? 이러고도 해방된 민족이라 하겠는가?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8(재인용, 282)

 

국제적인 외교관계에 있어 종주국이란 없다. 주권을 가진 국가라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위해 능동적으로 외교를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위안부 협상이 증명하듯, 대한민국은 강대국의 압력에 굴복해 굴욕적인 협상을 하고 말았다. 이것이 노예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함석헌 선생의 일갈이 가슴을 쿡 찌른다.

 

대한민국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알게 되는 것만큼, 절망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골수까지 썩어문드러졌다는 것만 재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비관적인 것 같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보다 비관적인 것은 없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저자도 대한민국을 쇄신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누가 보더라도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총체적 난국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의지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더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하는 자조 섞인 바람만 있을 뿐이다.

 

3달 후면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치러진다. 여당 대표는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180석이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한다. 운이 따른다면 개헌까지 가능한 200석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점친다. 야권이 분열하면서 서로 싸우느라 지리멸렬한 지금, 이루지 못할 소망은 아닐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JTBC 뉴스룸> 신년특집 토론에서 유시민 작가가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35%는 지지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으며 그러한 인간들이 만든 대한민국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세상, 헬조선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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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잘 하든지 아니면 잘 태어나든지.”

 

영화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에서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대사다. 저 대사에서 잘 하든지에 감춰져 있는 함의는 이렇다.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철저히 기득권 계층이 주입하는 사고를 내면화한 기생충이 되든지, 아니면 기득권 계층의 자녀로 환생하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출세하려면 말이다.

 

환생은 불가능한 일이니 결국 노예가 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영화에서 저 대사의 당사자인 우장훈 검사(조승우 분)는 출중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뒷배가 없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위 높으신 분들의 뒤를 열심히 닦았지만 그들에게는 일개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공공연하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한국 사회의 뒷모습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성접대의 적나라한 묘사 등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능력의 소용없음에 좌절하는 우장훈 검사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 우장훈 검사가 느꼈던 좌절감을 현실의 내가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서일 것이다.

 

능력주의는 신화다

 

한국 사회에 사는 대부분은 노력해서 능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내면화하고 있다.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손쉽게 부를 차지한 사람보다 스스로 모든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 더 대단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자수성가했다는 인물이 정말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을까. 최근에 읽은 <능력주의는 허구다>(사이, 2015)란 책은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대중이 매체를 통해 접하는 성공스토리 대부분은 재구성된 것이다. 요컨대 결과를 토대로 능력주의로 볼 수 있는 과정만 취사선택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세세히 들여다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성공에는 상당한 비능력적 요소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산재한 여러 비능력적 요인들을 무시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능력 자체만 가지고는 힘들다. 능력을 계발할 시간과 자본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능력을 발견해줘야 하며, 능력이 사용될 만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이는 모두 비능력적 요소다. <능력주의는 허구다>는 이러한 비능력적 요소를 사회적 자본, 문화적 자본, 교육, 상속, 외모, 차별, 운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삶을 결정하는 비능력적 요소들

 

열심히 노오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동력을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잘해도 내 탓이며 못해도 내 탓이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할 수 있기에 도리어 가장 쉬운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노력=성공의 등식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면 성공한다는 부모의 잔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능력주의는 허구다>는 초장부터 이러한 믿음에 균열을 낸다. 한국 사회가 불평등을 해소할 유일한 창구라고 여겼던 학교와 교육을 불평등을 대물림하는 잔인한 매개체라고 명명한다. 부모는 외면하고 있을지 몰라도 당사자인 학생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풍족한 집안에서 자란 친구가 공부도 훨씬 더 잘한다는 사실 말이다. 상위 계층의 학생들이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로 증명된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가난한 학생이 명문대에 진학했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가난한 학생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며, 이러한 환경은 학업 성취도를 저하시키는 요소로 작동한다. 대출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부유층 학생들은 좀 더 학업에 매진할 시간이 주어지고 이로 인해 성취의 측면에서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74) 이러한 비능력적 요소로 인해 가난한 학생들은 취업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간신히 취업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스펙을 갖췄다고 치자.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사회적 자본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본이란 인맥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취업경쟁에 있어 인맥은 취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력한 요소다. 소위 알음알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즉 일자리를 소개시켜줄 수 있는, 또 능력이 있다고 증명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알지 못한다면, 능력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

 

결국, 누구를 아는가가 중요하다.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는 모든 구직자 가운데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해당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얻은 사람이 56%에 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략) 연구에 참여한 응답자 중 개인적인 인맥이나 공식 경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지원한 사람은 18퍼센트에 불과했다. 채용 과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는 일자리도 많다.(92)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하늘이 내려준 비능력적 요소도 있다. 단적인 예로 매력적인 외모를 들 수 있다. 매력적인 외모는 타고난 것이며, 이는 완벽한 비능력적인 요소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를 선호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기회 구조”(270)를 형성한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취업성형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다. 하지만 성형이 타고난 외모를 이기기란 쉽지 않다.

 

또 태어난 시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기성세대는 요즘 세대에게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기성세대가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들이 좋은 타이밍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저성장의 늪에 빠졌을 때 태어난 세대보다 과거 한국이 초고속 성장을 하고 있을 때 태어난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한 채, 노력이라는 잣대로만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정한 출발을 넘어, 공정한 도착으로

 

인정하든 인정 못하든 간에 삶은 비능력적 요소에 의해 결정될 확률이 크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공정한 출발선이 주어진다는 전제만 있다면 각자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진보적 매체라는 <한겨레>조차 2016년 신년기획으로 청년에게 공정한 출발선을이라는 제목을 내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언컨대 공정한 출발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부모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또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은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다. 이처럼 비능력적 요소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소비에트 연방처럼 공산주의를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다. 공정한 출발선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뜻이다.

 

이제 공정한 출발선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패러다임을 공정한 도착으로 전환해야 한다. 누진세 상속세 등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세금을 도입하고, 강력한 복지제도의 구축이나 기부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부를 재분배하며, 노동·계층 운동을 통해 불평등을 억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을 기르자는 것이다. 언제까지 노오력에 목메고 있을 텐가. 능력주의 신화는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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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6.01.07 22:5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사실 능력 자체도 타고나는 것이 크죠. 진짜 공부로 타고난 사람들은 어릴때부터 천재 소리 들으면서 대학교수 하고 승승장구 하잖아요. 반면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나면 불리한 신체적 조건 때문에 공부를 하고 학습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많이 어려워지지요.

  2. H 2016.06.05 23:15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감합니다. 애초부터 똑같은 출발선은 없다는 것을... 그래도 그 격차를 줄여나가도록 노력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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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다.”

 

며칠 전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해 이렇게 썼다. 대학원 박사과정 지원 원서를 대학원 행정실에 제출하고 난 후였다.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내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딸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페이스북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 들어갔다고 선언한 것은 어떠한 불안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진로 때문에 불안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또래들이 어떤 미래를 살까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길은 이미 정해졌다고 믿었고 주변 또래들은 나를 부러워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이 서른이 다가온다는 부담, 내가 전공하는 주제에 관한 사회의 부정적인 평가, 선배가 처한 상황 등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확고부동한 믿음에 점점 실금이 생겨났다. 그것은 석사학위를 따고,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대학의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직접 번 돈을 손에 쥔다는 경험은 책을 읽으면서 얻는 깨달음처럼 달콤했다. 그래도 믿음을 완전히 깨뜨리고 불안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한숨이 습관이 될 만큼, 나를 불안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하나의 책이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책표지 ⓒ은행나무

 

허울을 벗긴 대학의 민낯

 

바로 지방시라고도 불리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은행나무, 2015)란 책이다. 지방시는 3091201호라는 특이한 필명의 저자가 쓴 책으로, 대학 내 대학원생이자 시간강사가 처한 상황을 고발하고 있다. 저자는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글을 풀어내는데, 거기에 가공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날것의 내용이 더해지니 어떤 감성적인 글보다도 가슴 깊이 절절함이 박혀들었다. 나는 저자와 같은 처지라 더 공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방시의 절절함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닌 듯하다. 지방시 관련 기사가 언론에서 쏟아지고 있다. 매일 들춰보는 신문들의 오피니언면에도 연일 관련 칼럼이 게재될 정도다. 대학이라는 허울에 가린 열악한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처우가 충격적이기도 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아마 시간강사 해고법이라 불리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다음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어떤 집단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법안은 모순적이게도 모두 그 집단을 파괴했다. 기간제법, 파견법 등 비정규직 보호법이 그러했다. 시간강사법 역시 유예되기 이전까지 동일한 방향으로 흘렀다. 과거를 답습하는 법의 시행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으로 연명하던 시간강사 대부분이 해고되고, 지도교수의 애정을 놓고 벌어진 충성경쟁에서 승리한 일부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물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23일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시간강사법 시행을 2년 유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긴 했다. 아직 국회 본회의가 남아있긴 하지만 사실상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현상유지일뿐더러, 2년 뒤에는 또 같은 일을 겪어야한다. 나도 2년 뒤 박사과정을 수료하면 시간강사의 삶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라, 걱정이다. 이제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지방대 시간강사라도 될 수 있을까

 

책을 통해 얼핏 바라본 저자의 삶에서 느낀 것은 반반이라는 감정이었다. 등록금이나 밥벌이는 같은 인문계열 전공이라 얼추 비슷했다. 하지만 저자의 대학원 생활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인적인 것이었다.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천국을 거닌 셈이었다. 제자의 사정을 아는 교수와 좋은 동료 덕에 편한 대학원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저속하지만 이상한 안도감도 들었다.

 

한편 저자의 시간강사 생활을 엿보며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는 이미 시간강사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책을 통해 본 저자는 좋은 선생이었다. 학생을 이해하려고, 학생을 위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시간강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본()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가 시간강사로 활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년 뒤 시간강사법이 원안대로 통과될 수도 있고, 내가 속한 학과가 인문계열이라 곧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말 그대로 반반이다. 안도감과 부러움이 교차했다. 지방시가 불러일으킨 긍정과 부정이 뒤섞인 감정이 앞으로 있을 대학원 박사과정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고만 것이다. 이미 지방대 시간강사인 저자가 버티지 못한 삶을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라도 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에 휩싸인 내가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고, 남은 것은 다가올 캄캄한 미래를 어떻게든 견뎌내는 일뿐이다.

 

함께 버텨낼 사람만 있다면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었을 여러 인연들과 나는 점차 이별했다. 내가 기댈 곳은 몸담고 있는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인문계 대학원에는 남자가 부족했고, 있다 하더라도 나와 또래인 이들은 거의 없었고, 더욱이 친구가 될 동갑은 전혀 없었다.”(57)

 

지방시의 모든 내용에 공감했지만, 유독 눈길이 간 내용은 친구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 역시 남자가 부족하고, 또래가 거의 없고, 동갑인 남자는 물론 여자도 전혀 없다. 또래가 아니면 아무래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또 관계없음에서 오는 외로움은 사람을 좀먹고 모든 의욕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물론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공부한 것을 토대로 서로 대화하고 비판하는 일도 중요한 공부 방법 중 하나다. 또 같은 길을 함께 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큰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이는 저자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서 버텨내고 있었다는 허벌이란 친구가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동지적 인간관계는 중요하다.

 

얼마 전 페이스북을 뒤적거리다 지방시의 저자가 대학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접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공감해줄 것이라 믿었던 동료의 타박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열악한 환경은 견딜 수 있어도 인간적 실망은 버티기 힘든 법이다. 동료에게마저 버림받은 집단에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대학은 한 명의 뛰어난 연구자와 좋은 선생을 함께 잃었다.

 

앞으로도 대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편승해 끊임없이 줄이고 자르고 통폐합할 것이다. 또 대학에 적을 둔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듯 엄혹한 대학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은 함께 버텨낼 사람을 찾는 것 외에는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이 체온을 나눌 때 눈보라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와 허벌의 관계처럼, 내게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가 있다. 이 글을 빌어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지은이 - 309동1201호

  출판사 - 은행나무

  출간일 - 2015년 11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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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6.01.02 06:08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흠.. 잘지내고 있는거죠?..
    올해도 꼭! 건강하게 우리 잘 버텨봐요.

    글을 보니..맘이 너무 아파요.
    밥 잘챙겨먹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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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익숙함으로 가득하다. 일상 속에 포함된 공간, 인물, 상황 등은 뻔하다. 한 번씩 색다른 일이 벌어지곤 하지만 그뿐이다. 떠돌이로 살지 않는 이상,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일상이다. 어쩌면 떠돌이 생활도 일상으로 고착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일상의 중력은 강력하다. 하지만 강력한 중력만큼 벗어나려는 마음도 비례한다. 일종의 관성이랄까.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의 저자도 일상에 질려버렸을 것이다. 강하게 짓누르는 일상의 중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를 통해 호주로 훌쩍 떠난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수중에 돈이 없는 저자가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호주 워킹홀리데이는 또 다른 일상에 불과했다. 이 책은 저자의 일상탈출기이자 일상체험기이다.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 책표지 ⓒ후마니타스


환상과 현실 사이

 

  

낯섦은 환상을 동반한다. 낯섦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우리는 그 구멍을 환상이라는 것으로 메운다. 다른 나라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최근 국외여행이 보편화됐다고는 하지만, 여행은 여행일 뿐 직접 그곳의 삶을 산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하지만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대부분은 일상을 여행으로 착각한다. 때문에 막상 일상이 닥쳐왔을 때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저자도 마찬가지였다. “워킹홀리데이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장기 여행이라는 생각이 더 컸기 때문(22)”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앞으로 겪을 노동은 호주를 여행하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호주 워킹홀리데이 생활은 일터에서 겪을 호주인과의 아름다운 교류 또는 호주에서 벌어질 환상적인 여행만이 존재했다.

 

환상과 현실의 간극은 상당히 컸다. 몸을 누일 숙소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생활을 위한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것까지. 뭐 하나 쉽게 풀리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바로 자신을 비롯한 속칭 워킹이라 불리는 이들이 호주 사회에서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워킹이 입국해서 일자리를 구하고 일을 하고 시급을 받는 모든 과정은 그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일을 시작할 때 근로계약서를 쓰지도 않고, 가게 주인들은 사람을 고용했다는 신고를 세무서에 하지도 않는다. (중략) 최저임금 절반의 시급, 규정보다 훨씬 긴 노동시간, 식사 시간이나 휴식 시간이 없는 환경,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이런 관행들은 직접 일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다.(47~48)”

 

워킹홀리데이 비자 발급과 함께 받은 세금 신고 번호를 직접 사용할 일이 없음(47)”을 목격하면서 저자는 본격적으로 워킹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순탄하지는 않다. 차이나타운, 주스 가게, 햄버거 집, 쇼핑센터의 초밥 가게 등을 전전한다. 하지만 단순노동은 사람을 쉽게 일하는 기계로 전락시켜버린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보트가 떠다니고 하늘은 늘 청명하게 높은 시드니에서 밤새 일하고 돌아오는 귀가 길에 하루 종일 손이 물에 닿아 불어버린 손톱(116)”을 봐야하는 괴리감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저자는 도시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농장으로 떠난다. 하지만 농장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워킹이란 존재는 호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용해먹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워킹을 싼값에 부려먹거나 임금을 체불하는 일은 빈번하다. 호주에 사는 교민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가장 등쳐 먹는다는 말이 공공연한 세상이다. 책에도 언급하는 것처럼 일자리를 알선하면서 높은 수수료와 체재비를 요구하는 것은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일이다.

 

워킹이라는 허울뿐인 이름

 

경찰에게 돈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한 한국 사람들이나, 경찰에 들킬까 봐 숙소로 돌아가 버린 네팔 사람들이나, 경찰들 앞에서 우리는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최저임금의 반의 반도 안 되는 돈을 받고, 하루 종일 일하면 그만인 사람들이었다. (중략) 경찰들을 보면서 나는 이것이 호주가 우리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온 사람들을, 이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219)”

 

워킹홀리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제도는 호주의 이주 노동자 충원 제도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목격했을 때 호주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접는다. 호주나 한국이나. 서로 다를 것은 없었다. 차라리, 국민과 외국인 사이에 끼인 워킹이라는 존재보다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게 좀 더 나은 일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저자가 워킹홀리데이 제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씌어 있는 미지의 세계, 청춘의 열정으로 가득한 야생의 세계, 그러면서도 서양의 문물을 간직한 선진적 세계(228)”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워킹 생활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환상은 현실을 살아내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꿈을 꾼다. 하지만 꿈만으로는 부족하다. 또 영어만을 바라보고 1년 이상을 허비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차라리 저자가 워킹 경험 속에서 맞닥뜨린 보이지 않는 것(231)”을 직면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식당 설거지 담당, 새벽의 건물 청소부, 농장 노동자 등등. 은폐되어 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는 순간 저자가 이 책을 세상에 내보인 것처럼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참혹하고, 희망은 요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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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스물다섯 청춘의 워킹홀리데이 분투기

  글쓴이 - 정진아

  출판사 - 후마니타스

  출간일 - 2015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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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22 16:31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5.07.22 23:01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사실 웬만한 영어실력을 한국에서 착실히 쌓고 외국으로 가는 게 아니면 외국에서 1년 남짓 산다고 영어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지는 않아요. 주위에서도 그런 사람들 많이 봤고 저만 해도... 그러니 대부분의 경우에 영어를 빌미로 착취 당할 수밖에 없는 거죠...

  3.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5.07.23 23:24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우리나라만 하겠나..싶어요. (우리나라가 더 심하다는 뜻임.)
    잘 읽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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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노동을 신성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과연 신성한가. 시궁창에 처박혀 있는 것은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노동은 신성한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가 노동의 신성함만큼 대우받고 있는지 묻고 싶다. 언론에 심심찮게 보도되는, 저 높은 곳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정말 신성한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노동에 붙는 수식어를 살펴보면 신성한보다는 고된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은 고된 것이다. 누구도 노동을 신성시 하지 않는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 생활이 보장된다면 때려 칠 사람이 부지기수다.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를 부러워하며, 고된 노동을 일종의 굴레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타인의 노동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신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대기업의 속사정 또는 유명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쏠려 있다. 대중의 관심이 부재한 자리에 울리는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외침은 당연히 공허할 수밖에 없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모두가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인식의 대전환이다.

 

이와 관련해 의미 있는 책이 최근 나왔다. 바로 박점규 작가의 <노동여지도>. <노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조선 땅을 일일이 밟으며 대동여지도를 그린 것처럼, 저자가 대한민국 땅을 밟으며 전국의 노동현장을 그려낸 결과물이다. 이 책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하려는 이들에게 믿음직한 동반자가 될 만하다.


<노동여지도>, 책표지 ⓒ알마

 

노동, 삶의 다른 이름


 

노동은 속칭 금수저로 불리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네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노동은 삶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을 족쇄로 여기고, 언젠가는 결코 끊어내고 말리라 다짐한다. 우리나라의 비정상적인 교육열은 내 자식은 이 족쇄를 끊어주리라는 믿음의 징후일 것이다.

 

하지만 2015년인 지금 노동의 족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는 끊겼다. 남은 방법은 하나다.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현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시작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를 28개 도시 속 노동현장으로 이끈다.

 

수원, 울산, 평택 등 노동문제와 관련해 언론에서 여러 차례 보도된 탓에 우리가 익숙한 곳에서부터 광주, 경주 등 노동문제와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곳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전국의 노동현장을 생생히 그려낸다. 이를 통해 우리 삶과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지적한다.

 

저자가 전국의 노동현장을 종횡무진 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저 취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세상에 내놓은 노동여지도의 주제는 비정규직 문제다.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사회가 처한 노동문제 중 가장 해결하기 힘든 난제다. 같은 일을 함에도 임금과 복지에 차등이 있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간극을 만들고, 분열에 이르게 한다.

 

2013년 기아자동차와 정규직노조가 장기근속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데 합의하자 사내하청 우선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김 부장은 시너를 뿌리고 분신으로 항거했다. 세 딸아이의 아빠가 아이들에게 비정규직을 물려줄 수 없다고 외친 날은 우연히도 세월호 침몰일인 416일이었다.(139)

 

공장 앞 선술집에 모인 비정규직 대의원들이 분노를 쏟아낸다. 정규직과 하나의 노조를 이루다보니 비정규직이 정규직노조에 기대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동료가 분신했는데도 가만히 있고,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한 알바노동자들을 외면한다고 대의원들은 열 받아 한다. 최근 사내하청 130명을 뽑았는데 정규직 조합원들이 사내하청에라도 자녀를 넣으려고 했단다. 그런데 비정규직들이 우리 자녀도 해달라고 했단다. 정규직노조의 나쁜 점만 배우고 있다고 한탄한다.“(140~141)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바로 노동현장의 모습이다. 자신의 안위에 천착하다보면 자신이 이러한 아귀다툼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노동여지도>가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나와 내 가정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투쟁에서 한 걸음 물러나 노동현실 전반을 조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항상 스스로를 객관화 하지 않으면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노동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아귀다툼을 자신만의 콜로세움에서 낄낄거리며 지켜보고 있는 자본가의 모습을 올려다봐야 한다. 하지만 모두가 싸움을 멈추지 않으면 올려다볼 수 없다. 눈앞에 칼을 휘두르는 적이 있는데 어느 누가 싸움을 멈출 수 있을까.

 

연대, 상투적인 만큼 진리에 가까운 방법

 

대공장 정규직은 부잣집 마름, 중소기업 노동자는 가난한 집 머슴이에요. 대공장 정규직이 이제 신분이 되어버렸죠. 완성차, 부품사 정규직 노조가 책임감을 가지고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합니다.”(124)

 

모두가 싸움을 멈추는 방법은 딱 하나다. ‘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쉽지 않은 일이다. 차등이 실존하는 사회에서 연대를 실천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은 필수불가결이다. 희생이란 없는 곳에서보다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게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다면 연대의 시작은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품는 것에서부터이지 않을까.

 

혁명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된 것도, 독재의 서슬퍼런 칼날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두 누군가의 희생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몇몇을 제외한 모두가 노동자인 사회에서, 1퍼센트의 자본가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과실을 차지하고 있는 비참한 사회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천민을 만든다는 것은 때린 데 또 때리는 격이 아닌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건 할 소리를 하고 살 수 있게 됐다는 거예요.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게 뭔지 알 게 됐어요. 우리가 뭉쳐서 싸웠기 때문이죠.”(52)

 

삼성전자서비스 젊은 친구들에게 노동조합이 따낸 것도 없는데 좋은 게 뭐냐고 물으니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좋다는 거야. 또 같이 일하는 동료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는 거야.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203~204)

 

“‘사축이라는 말을 아세요? ‘회사의 가축이라고 일본의 직장인들이 스스로 비하해서 하는 말이라고 해요.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열심히 일하면 인정받을 수 있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이제는 좀 멈춰야 하지 않을까요?”(383)

 

저자가 <노동여지도>에 담아낸 목소리는 모두 인간답게살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말하고 있다. 저자가 밟은 노동현장에서는 그 암울함 속에서도 작지만 소중한 연대의 성과들이 있었다. 연대하면 이뤄낼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19604.19혁명에서부터 19876월 항쟁까지. 전례는 충분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선언은 더 이상 빨갱이나 종북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노동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선언으로 전유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노동자여, 연대하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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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노동여지도

  글쓴이 - 박점규

  출판사 - 알마

  출간일 - 2015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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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5.07.23 23:21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이책 꼭 읽고 싶었어요. 조만간 서점가면 델꼬 오려구요. 책소감도 잘 읽었어요! 멋져요!

    요즘 많이 더워요. 잘 지내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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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삶을 살았던 남자, 색깔을 얻다

[리뷰]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

 

 

죽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 무언가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삶은 죽음을 지향한다. 615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마을 주변을 시찰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마신다. 이후 수도꼭지를 수리하고 새 나사를 박고 도구들을 정리한다. 그는 명확하게 죽음을 원하고 있지만 행동은 그와 정 반대다.

 

이 남자는 프레드릭 베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오베라는 이름의 남자는 색깔이 없는 사람이다. 인생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조연으로 삶을 살아가는 남자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사진 속 배경처럼, 그저 자신이 부여받았다고 믿는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남자다. 그래서 그는 변화에 저항하고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색깔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오베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더듬다보니 영화 <플레전트 빌>이 떠올랐다. 영화 속 배경인 플레전트 빌은 완전무결한 불변의 세계이다. 사람이 모여 살면 으레 일어날법한 갈등도 없고, 오로지 기쁨만 존재하는 마을이다. 플레전트 빌은 오베라는 남자처럼 색깔이 없다. 그들은 흑백의 삶을 산다. 하지만 흑백의 세상에 <플레전트 빌>의 주인공 데이빗과 제니퍼가 떨어지면서 완전무결함에 균열이 일어나고, 종래에는 플레전트 빌에 사는 사람들 모두 색깔을 얻는다.

 

오베라는 남자도 색깔이 무엇인지 느꼈던 적이 있었다. 소냐라는 여자를 만나면서부터다. 소냐는 모든 색깔의 물감을 담은 파레트였다. 그는 우연히 야간 기차 청소부를 하면서 그녀를 만났고, 그녀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의 색깔에 물들기 시작했다. 소냐는 세상의 배경처럼 살아왔던 오베를 발견해낸 것이다. 오베는 그렇게 세상의 배경이 아니라 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소냐와 함께 있었다고 해서 오베라는 남자가 색깔을 완전히 얻은 것은 아니었다. 소냐 곁에 있었기 때문에 색깔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소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오베라는 남자는 다시 색깔을 잃었다. 그는 소냐의 죽음 이후에도 변함없이 오전 615분 전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마을을 시찰했다. 하지만 그가 매일 같은 삶을 반복하는 동안 세상은 급격하게 변했다.

 

그는 완고했으며,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이 트레일러를 후진할 수 있어야 하고, 라디에이터의 증기를 스스로 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것이 그의 원칙이었으며, 그는 평생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느긋한 인생을 즐기라는 말과 함께 인생의 3분의 1을 일해 온 곳에서 해고됐고, 주변 사람들에게 구제불능이라고 여김 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아내 소냐 곁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죽어야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일상의 단절을 요구하는 것이 죽음임에도 그는 자신이 지켜왔던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자살을 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의 원칙을 흩뜨리는 일이 일어나면서 자살하려는 계획은 계속 미뤄진다.

 

그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먹으면서부터 그의 원칙보다는 소냐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떠올린다. 자살 이후 소냐의 곁으로 갔을 때 소냐가 그것을 좋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이웃을 도와주는 일,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고양이를 데려다 키우는 일, 전에 싸웠던 친구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 등을 계속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타인과 단절된 삶을 살지 않는다. 오베라는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과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 체득해간다.

 

오베라는 남자는 시간이 흘러 끝내 소냐의 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은 그가 원했던 것처럼 조촐하게 끝나지 않는다. 300여 명의 사람이 모여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는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했지만 그의 삶은 어쩌면 자신이 증오했던 하얀 셔츠의 남자들처럼 편협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색깔을 얻었다. 그의 삶은 대부분 흑백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죽음은 오색찬란했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란 상당히 지난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며 투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세상의 최우선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원칙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판단한다. 우리의 언어대로 그들의 언어를 마음대로 번역한다. 이러한 세상은 아비규환이며, 오베라는 남자처럼 자살이란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리가 오색찬란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베라는 남자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우리의 생각으로만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이야기가 녹아있다. 나의 이야기와 타인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얽히고설킬 때, 오베라는 남자가 깨달은 소통이 일어난다. 우리는 지금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과 연대는 그만큼 힘이 세다. 구제불능이라고 여겼던 오베라는 남자가 결국에는 변화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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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오베라는 남자

  글쓴이 - 프레드릭 베크만

  옮긴이 - 최민우

  출판사 - 다산책방

  출간일 - 2015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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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5.05.19 22:49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와우~~
    너무 멋진책이네요.
    현대인들에게 잔잔하게 감동을 줄듯하네요.
    서펑 너무 잘읽었어요!
    당연히 반가워서 왔구요ㅎ
    하고픈일 더많아지는 날들이 많아지길..바래요!! 파이팅!!

  2. BlogIcon 하이 2016.06.09 13:20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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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사회는 지식이나 정보를 얼마나 점유하는가에 따라 이윤의 크기가 달라진다. 때문에 특정인이 지식·정보에 관한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한 지식재산권은 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권리 중 하나다. 지식재산권을 침해하는 해적(海賊)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처벌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하지만 지식재산권을 인정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다. 예컨대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이나 최근 여러 나라에서 성장하고 있는 해적당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지식재산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적재산권을 악용해 지식과 정보를 특정한 집단이 독점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지식·정보를 생산한 자의 배타적인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과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를 위해 지식·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서로 상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산자의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정당한 몫을 가지길 원하는 것이 옳으며, 사회적인 시각에서 보면 지식·정보가 공유되는 것이 사회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해적한 스캔들>, 책표지 ⓒ사계절

 

최초의 저작권 분쟁

 

<해적판 스캔들>은 앞서 언급한 지식재산권의 딜레마에 관한 고민이 담긴 책이다. 고민을 진전시키기 위한 첫 걸음은 문제의 시발(始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지적재산권의 개념이 처음 법으로 정립된 18세기 영국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저자에 따르면 1710년 영국에서 제정된 앤여왕법이 최초의 저작권법이라고 한다. 이는 영국의 서점주 조합이 학문의 진흥을 위해 문학의 소유권을 법률로 정해달라고 의회에 청원(76-77)”한 것에서 연원했다. 앤여왕법은 11조로 구성되어있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책의 저작자 및 저작자로부터 판()을 양도받은 자에게는 인쇄의 독점권이 있다. 이미 출판된 책은 1710410일부터 21년간, 앞으로 출판되는 책은 공표된 때부터 14년간 보호된다.


2조 보호를 받으려는 자는 출판하기 전에 책을 서점주 조합에 등기해야 한다.


1114년간 보호 기간이 끝날 때까지 저자가 살아 있으면 인쇄 독점권은 일단 저자에게 돌아가고 다시 14년간 보호된다."(78-79)

 

앤여왕법은 책의 저작자 및 저작자로부터 판()을 양도받은 자에게는 인쇄의 독점권이 있다고 명시한다. 여기서 저작권과 인쇄의 독점권은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당시 영국에서는 저자에게 지급하는 인세의 개념이 없었다. 대신 저작권자가 작품의 권리 자체를 서점주조합에 파는 형식의 지적재산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때문에 서점주가 저작권자의 작품을 인쇄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더라도 저작권자는 서점주에게 작품의 권리를 팔았기 때문에 인쇄로 남긴 이윤의 배부를 요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출판시장에서 서점주조합의 힘은 막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관행은 문제없이 횡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앤여왕법이 법으로 보호하는 21년의 기간을 넘긴 작품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서점주조합이 해적판이라 부르는 책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주로 스코틀랜드에서 출판됐고, 이를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 알렉산더 도널드슨이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유통된 해적판은 서점주조합이 출판한 책보다 상당히 저렴했다.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도널드슨은 사업을 확장했는데, 이러한 도널드슨의 해적판 유통으로 피해를 입은 서점주조합은 도널드슨을 저작권 침해로 제소했다.

 

최초의 저작권 분쟁을 촉발시킨 책은 제임스 톰슨의 <사계절>이었다. 앤여왕법에 따르면 당시 <사계절>의 법적인 보호기간은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사계절>의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었던 런던의 서점주 베케트는 생각이 달랐다. 저작권은 영구적인 것이라 생각했고 이는 서점주조합의 생각과도 같았다. 베케트를 필두로 한 서점주조합은 도널드슨과의 재판을 통해, 손실을 만회할 뿐만 아니라 영구적인 저작권을 획득하려는 노림수가 있었다.

 

이윤의 창출 VS 인류의 발전

 

"지금 논쟁이 되고 있는 영구성은 꺼림칙하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반대해야 할 것일 뿐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식과 과학이 이러한 거미줄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193)

 

3주 동안 진행된 도널드슨·베케트 재판은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도널드슨이 승리했다. 얼핏 보면 이 재판이 저작권의 찬반 논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저작권의 영구화를 주장하는 측과 앤여왕법을 유지하자는 측의 싸움이었다. 현재의 카피레프트 운동이나 해적당의 활동도 동일한 맥락에 있다.

 

권력이나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려는 시도는 어느 때나 있어왔다. 하지만 지식과 정보의 생산은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류가 오랜 기간 동안 축적해온 지식과 정보의 기반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은 이러한 인식에서 기인한다.

 

물론 저자의 권리라는 의미로써 저작권은 분명히 중요하다. 분명히 하나의 작품은 누군가의 창작물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유산이기도 함으로 그것을 창출해낸 인물의 사후에는 공유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위대함을 발판으로 사회와 문명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인세제도나 한시적인 저작권 제도는 신이나 하늘이 준 것이 아니라 문화를 독점하는 자에게 도전한 해적의 싸움에 의해 얻어진 것(324)”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저작권이 보호하는 배타적 권리의 기간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다. 앤여왕법의 21년에서 시작한 보호기간은 이제 저작권자 사후 50년이 지나야 끝난다. 이러한 추세라면 언젠가 지식재산권의 영구화에 이를지도 모른다. 이제 18세기 영국이 했던 고민을 다시 시작해야할 때다.


 

책 정보(책 표지를 클릭하세요)


  

  책제목 - 해적판 스캔들

  글쓴이 - 야마다 쇼지

  옮긴이 - 송태욱

  출판사 - 사계절

  출간일 - 2011년 9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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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5.02.06 19:4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저작권..참 고민 많이해야 할듯싶어요..
    본질을 벗어난 저작권 논쟁과 이권이 너무 많아요..
    아무튼 잘 읽고가요~~
    주말도 넉넉하고 행복한 시간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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