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지금껏 여러 선거에 참여했지만, 선거철만 되면 기묘함을 느낀다. 평소엔 문자 한 통 없었던 사람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문자를 보내오고, 텔레비전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 눈앞에서 명함을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흙수저라 불리는 비루한 인생이 권력자만의 기분을 맛볼 수 있다니! 아이러니하다.

 

나와 같은 유권자들이 선거철에만 도래하는 기묘한 아이러니의 충격을 맛보고 있을 때, 선거에 출마하는 각 후보자들은 어떻게 하면 유권자들의 표를 얻을 수 있을까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이다. 매일 출퇴근 시간에 명함을 돌리며 인사를 하면 될까, 전통시장에 찾아가서 먹방을 찍으면 될까, 문자를 수천수백 통 보내면 될까하고 말이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유권자의 한 표는 매우 큰 힘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표만으로 선거에서 이길 수는 없다.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읽으려 애쓴다. 이를 읽지 못하면 선거운동기간 내내 헛발질만 하다 낙선하고 만다. 표심을 알기 위해 안달하고 있을 후보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바로 󰡔표심의 역습󰡕(책담, 2016)이란 책이다.

 

󰡔표심의 역습󰡕새로 그리는 대한민국 유권자 지도라는 주제로 내일신문사와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팀이 기획하고 한국리서치가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쓰였다. 한국 정치 지형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네 가지 키워드인 세대, 지역, 계층, 이념을 매개로 전체적인 한국 유권자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세간에 통용되는 기존의 통념과 다른 점이 많아 흥미롭다.

 

정치꾼이 문제다

 

기존의 통념과 다른 부분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역주의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한국의 정치지형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지역주의다. 예컨대 영남은 새누리당의 텃밭이며, 호남은 더불어민주당의 텃밭이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은 영호남의 지역주의 때문이라고 힐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표심의 역습󰡕은 이를 부정한다.

 

󰡔표심의 역습󰡕지역주의의 원인에 대한 지역 유권자들의 인식에 관한 여론조사(본문 125)를 실시했다. 이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역 유권자들은 지역주의의 원인을 정치지도자들이 지역감정 조장으로 꼽았다. 다른 항목인 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 특정 지역민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 공직 인사에서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 혹은 특혜 등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쉬운 공식이 바로 네트워크에 기대는 것이다. 예컨대 해당 지역에 살지도 않으면서 선거철만 되면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OO의 아들이라 칭하는 것을 보라. 혈연, 학연, 지연 등 온갖 네트워크를 통해 선거 운동을 하는 것은 이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각 지역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면면만 봐도 그 지역 출신이 아닌 경우는 드물다. 요컨대 지역주의는 유권자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인의 필요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의 일을 생각한다고 영국의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는 말했다. 이 말에 비추어볼 때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내가 보기에 한국 정치인 다수는 정치꾼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책으로 유권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무리 지난한 일이라 하지만, 선거의 당선을 위해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과연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이라 할 수 있는가. 지역주의에 호응하는 유권자의 문제도 분명 존재하지만, 지역주의를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하는 정치꾼이 더 문제다.

 

정당정치의 부재

 

또 놀라웠던 것은 한국 유권자들의 70% 정도가 지지정당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타의 여론조사를 보면 어떤 법칙이 있는 것 마냥 유권자들의 지지정당 비율이 정해져 있어 보였는데 말이다. 󰡔표심의 역습󰡕에 따르면 이는 여론조사 방법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응답자는 주어진 응답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지지정당이 없다는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면 응답자들은 제시된 정당 중 하나를 택하려 한다(본문 292)”는 것이다.

 

한국 유권자의 다수가 지지정당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당정치의 부재에 원인이 있다. 한국 정치에 정당정치가 부재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선거제도의 문제 때문이다. 소수 정당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하나도 없는 소선거구제+다수대표제에서 정당에게 선명함을 요구하는 것은 스스로 죽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정당은 확장성을 위해 모호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여러 이념이 섞인 이상한 연합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다수대표제 하에서 정치인은 위대한 신념만으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 당선을 위해 표를 하나라도 더 긁어모으려 앞서 언급한 네트워크를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정치 지형에서 정치가를 꿈꾸며 국회에 입성했던 정치인이 정치꾼으로 바뀌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정당을 신뢰하지 못하며, 자신을 제대로 대변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악순환이다.

 

다음 세대의 일을 생각하는 선거

 

정치인이 정치꾼으로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정치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 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유권자들만이 가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다음 세대의 일을 생각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것, 다시 말해 유권자 자신들의 표심이 다음 세대의 일을 생각하는 정치인에게 있다 주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6413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혈연, 학연, 지연 등 네트워크에 호응하는 선거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일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고민하는 선거가 되길 바란다. 2016413일 이후가 좀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될지, 좀 더 나쁜 대한민국이 될지 알 수 없지만 표심의 방향이 정치꾼의 호응이 아니라 유권자의 주체적인 의견 표명으로 조금이나마 바뀐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그 조금의 변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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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6.03.31 20:14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잘 지내고 있죠? 봄날이라 몸이 많이 나른해요. 몸관리 잘하구요.
    글이 점점 더 좋아지는 거 같아요.

    다음세대를 걱정하는 정치인이 있는가..싶은거여요. 아무튼.. 덜 나쁜놈..을 뽑아야죠.
    그래서 사실 서러워요. 아직은 정치는 정치인만들 위한 거같으니깐요. 본래 정치는 나와 우리의 삶을 바꾸는..그런건데..

    아무튼, 한해 1/4이 훌쩍 지나삤네요. 잘 살아내보자구요.

  2. BlogIcon 1466266128 2016.06.19 01:08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잘 읽고 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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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근시를 앓고 있다. 6살 때였나, 한 달 정도 눈병을 앓더니 눈이 급격히 나빠졌다. 가까이서 텔레비전을 보던 습관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때부터였으니 안경과 동고동락한 지도 얼추 25년이 지났다. 25년간 흐릿한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기상 후 초점이 나가 뿌옇게 뭉개진 시야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떠 더듬더듬 안경을 찾는 일은, 우스꽝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숙명이 되어버렸다.

 

안경은 내 삶의 일부다. 만약 안경이 없다면 나는 멀리 있는 어떤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코앞에 있어야만 어떤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삶이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시력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 사회가 보이지 않는 삶, 어느 것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근시 사회라 명명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폴 로버츠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다. 그는 <근시 사회>(민음사, 2016)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근시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안경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 모두가 코앞만 바라보며 현재를 소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래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사회가 어떻게 파괴되어버릴지 모르는 것 마냥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 애쓴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어떤 결과로 치달을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파괴된 공동체, 자아의 극대화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재미있게 보았다. 내가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여주인공의 남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쌍문동 사람들이 형성하고 있던 마을공동체였다. 그들은 이웃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일부러 음식을 많이 했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아이를 이웃에게 맡기고, 마을에 속한 사람이 아프기라도 하면 모두가 병문안을 갔다. 모두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내가 어렸을 적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였지만 옆집 문은 항상 활짝 열려있었고, 나는 그곳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2016, 지금은 어떤가.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나 역시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이웃을 모르니 음식을 나눠줄 일도 없다. 자신의 아이를 만지기라도 하면 학을 떼는 부모가 늘었다. 마을공동체는 파괴되었고, 이제 마을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군집에 불과해졌다.

 

어쩌다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개인을 서로 결속해주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일까. 저자는 이를 자본주의의 문제로 파악한 듯하다. 자본주의는 경제가 끊임없이 성장할 것을 전제로 굴러가는 체제다. 그런데 만약 경제 성장이 멈춘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불안한 미래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확실한 현재를 도모하려 들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일을 팔아 현재를 사는 것이다.

 

과거에는 현재를 팔아 더 나은 미래를 사려했다. 때문에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더라도 그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려 했다. 하지만 1997IMF 사태와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겪은 이후 사회는 경제가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잃어버렸다. 결국 사회는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기보다는 보다 확실한 현재를 착취하기로 결정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욕망 추구를 제어하기 보다는 극단으로 밀어붙여야만 한다. 공동체보다는 개개인의 자아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제 사회는 개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스템을 완벽히 구축한 듯하다. 신이라고도 불리는 구글은 나의 검색 패턴을 분석해 내가 소비할 만한 상품을 광고로 제시한다. 스마트폰을 통하면, 손가락만 몇 번 놀렸을 뿐인데도 쉽게 내가 원하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개개인의 정치성향을 파악하고 개개인이 관심 가질만한 공약과 정책을 선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개인의 욕망 추구가 쉬웠던 때가 있었던가.

 

근시안적인 기업과 사회

 

기업과 사회는 현실을 착취하기 위해 근시안적으로 철저히 변했다. 책은 미국 사회를 예로 들고 있지만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기술에 투자해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기보다 인건비 절감을 통한 이윤 추구를 선택했다. 이를 위해 쉽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통과시키려 안달하는 노동개혁 5대 법안도 같은 선상에 있다.

 

기업에서 인력을 채용하려할 때 경력직을 선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규인력을 채용해 교육하는 시간과 비용이 아까운 것이다. 청년실업률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경력을 쌓을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취업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에서 청년들이 살아갈 희망은 없다. ‘헬조선이니 망한민국이니 하는 말들이 청년들 사이에서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건강을 책임지는 의료 관련 산업은 어떤가. 앞서 언급한 노동개혁 5대 법안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가 통과시키려 애를 쓰고 있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의료산업이 영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법이다. 만약 의료산업이 영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건강보다 의료 서비스나 약의 매출이 우선시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는 드물다. 정치꾼만 득시글거린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기보다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자신이 속한 당의 공천을 받으려 애쓴다. 다음 선거에 이기기 위해 온갖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이 같은 사회에서 과연 미래를 찾을 수 있을까.

 

공동체의 회복을 위하여

 

미래의 암울한 전망은 장밋빛으로 변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는 근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잃어버린 공동체의 회복을 주장한다. 개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길 멈추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자고 요청한다. 그런데 저자의 요청에 응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궁금하다.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의 사람들은 지금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것이라 자조(自嘲)하는 데 자신의 심력을 소모하고 있을 뿐이다. 안경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한줄기 기대를 거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룬 경험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아름다웠던 공동체를 우리가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욕망을 유보하고,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한 공동체를 꾸리려는 시도 자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저자가 책 말미에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다음 용기를 내야 한다.

 

남들을 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이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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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4시간, 1440, 86400. ‘시간은 인간이 평등하다고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다. 소유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만은 결코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모두 하루 24시간의 지배 하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노오력을 신봉하는 자들의 도구로 종종 사용되곤 한다.

 

정말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일까. 24시간, 1440, 86400, ‘시간이란 수사로 추상화된 삶은 인간 모두에게 평등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각자의 시간이 자본에 의해 노예화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시간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주장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

 

대학생을 예로 들어보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든든한 뒷배가 있는 대학생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대학생은 불안한 생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만 한다. 밤늦게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며 공부하는 대학생과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대학생이 과연 같은 시간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대학생뿐만이 아니다. 모두 각자 자신의 시간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간다. 별다른 의문 없이, 돈 없는 것을 자조하며 주인의 핍박을 견디며 살아간다. 돈 없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시간조차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삶을 우리는 그저 견디며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2012년 겨울,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는 그저 망상일 뿐일까.

 

저당 잡힌 시간, 소진되는 삶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코난북스, 2015)는 그동안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시간문제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책은 시간문제가 단지 시간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노동체제, 부채, 디지털화, 부동산, 사교육 등 사회 전반의 것들과 긴밀히 연계돼 우리의 삶을 소진시킨다고 폭로한다.

 

먼저 부채와 시간의 관계를 살펴보자. 한국 사회는 현재 빚잔치를 연일 벌이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가계부채는 1166조 원에 달한다. 그럼에도 빚내서 집사라는 언설이 난무한다. 부동산뿐인가. 대학생 중 태반은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을 안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 사회에 나와도 일자리는 없고, 빚 갚을 길은 요원하다.

 

빚은 미래에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믿음을 화폐로 교환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래를 담보로 돈을 빌린 것이다. 이는 미래를 되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시간으로 강제된다. 금융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미래는 신용등급 일람표와 부채의 규모가 설계”(37)하는 것이다.

 

갚아야할 부채가 얼마 남았고, 더 빌릴 수 있는 여지가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미래의 시간 앞에 놓인 개인은 미래가 안정적이길 바란다. 미래가 예상을 벗어난 모험의 시간이 되기보다는 연체 없는 분할 납부가 가능한 시간이길 희망한다. 그러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개인의 현재는 더욱 제약될 수밖에 없다.”(37)

 

디지털화는 어떤가. 기술발전으로 시스템 대부분이 디지털화된 사회는 표면적으로 시공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전세계가 디지털이라는 기술로 연결돼 있고, 재택근무, 프리랜서 등 새로운 형태의 직업도 생겨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발전은 도리어 개인의 시간을 얽매 주체적인 시간 활용을 가로막는다.

 

언젠가 빨리 파일을 보내라는 상사의 메시지에 1% 남은 배터리를 보며 폰이 죽으면 나도 죽겠지읊조리는 직장인의 모습이 나온 한 TV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과거에는 퇴근하면 직장인은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퇴근이란 단어는 없다. 회사를 벗어나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항시 대기상태에 놓인다.

 

내내 일하지는 않지만 항상 일할 태세가 되어 있기를 요구하는 방식. 이러한 노동 패턴은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 간의 경계를 파괴하고,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의 시간 가운데 어느 부분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이를 특별한 종류의 빈곤으로서 시간의 빈곤이라고 말할 수 있다.”(55)

 

대표적인 예 두 가지만 소개했지만, 시간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다양하다. 공부하기 좋은 나이라며 청소년의 시간을 모두 공부에 쏟아붓도록 만든다. 또 산업재해가 일어나도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작업을 중지하지 못한다. 인건비 절감, 상사의 눈치, 의미 없는 회식 등 강제된 야간 노동도 빈번하다.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나.

 

장시간 노동 체제는 우리의 시간, 가족의 시간을 빨아들여 몸집을 불려 양적 성장 중심의 사회를 지탱했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일하는 기계가 되었고, ‘돈의 노예가 되었다. 이웃과 동료에 연대하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눈감고 오로지 나와 가족의 생존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심성을 갖게 되었다.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내가 살아남으면 된다는 보수적인심성 또한 갖게 되었다.”(120)

 

이는 사람들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는 사회의 문제다. 우리는 이 같은 사회의 행태를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사회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삶을 모두 소진시키기 위해 더욱 가혹한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자는 인식을 깨뜨리고 우리의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찾은 노동계급 자료보관소에서 뜻밖의 자료를 발견한다.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이 남긴 자료에서 저항의 난폭한 표현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노동자들이 선술집에서 형이상학을 논하고 저녁에는 인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자신들만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다룬 자료를 발견한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 자료를 통해 노동자들도 철학과 예술적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노동자들도 철학자나 예술가와 같은 동등한 사람이며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도출해내고, 이를 프롤레타리아의 밤: 19세기 프랑스에서의 노동자의 꿈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정리한다.

 

이 내용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저당 잡은 사회의 은폐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 외에 답이 없다는 뜻이다. 철학과 예술을 통해 사회를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자는 인식을 버리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자. 다음날 노동을 위한 재충전으로 소중한 시간을 버리지 말자.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철학과 예술을 통해 우리의 삶을 한 단계 성숙시키자. 우리는 모두 철학자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자문하자. 우리는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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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용무도(昏庸無道).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는 뜻이다. 현재 대한민국 상황을 꿰뚫어 본 촌철살인의 표현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온통 어지럽고, 인간의 도리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이다. 청년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헬조선이라 비하하며 탈조선하고 싶다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이 미래가 없다고 선언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란 의문을 자주 품게 된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세월호 사건이 있고 난 후부터였다. 아직까지 세월호 사건은 납득할 만한 해결 없이 답보상태다. 1년 뒤 메르스 사태가 터졌다. 세월호 사건 이후 안전을 강조했던 정부의 말은 허망하게 흩어졌고 38명의 애꿎은 목숨만 희생됐다.

 

2016, 새해를 맞이했지만 혼란은 잦아들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 정부가 최종적·불가역적이란 이해하기 힘든 관형사가 붙은 위안부 협상을 타결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못한 협상이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엄마부대라는 요상한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며 이제는 일본을 용서해주자고 피해자를 윽박지르는 이상한 곳이다.

 

대한민국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사죄를 해 달라 구걸해야만 하는 곳이다. 대한민국은 피해자는 정부의 위로와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자신들의 요구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협상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곳이다. 대한민국은 사과도 하고 10억 엔이라는 돈도 준다는 데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며 구경꾼들에게 피해자가 타박을 받아야하는 곳이다. 대한민국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무례와 폐륜, 악의 번영

 

도무지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맞닥뜨릴 때면, 밖으로 뛰쳐나가 짱돌을 들 용기가 없는 나는 대신 방구석에 들어가 책을 집어 들곤 한다. 이번엔 <대한민국은 왜?>(사계절, 2015)란 책을 펼쳤다. 유명한 사회학자 김동춘이 쓴 이 책은 큰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수없이 떠올랐던 대한민국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란 질문에 나름대로의 답을 내게 내밀었다.

 

책이 제시한 답의 요지는 아주 간단하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대한민국이라는 옷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올바른 토대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적극적 방조 하에서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성립됐다는 것이다. 시작이 잘못됐다면 이후의 모든 과정도 잘못되리라는 것은 필연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미군정은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을 대부분 활용했다. 기술·행정 관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때문에 민족반역자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이들은 처 들어가 매타작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권력 앞에서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또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인사 대부분이 숙청당했다. 끝내 일제 부역자들의 수장인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의 대통령이 됐다.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터져버렸고, 현재까지도 민주주의를 좀 먹고 있는 반공주의가 대한민국에 도래하고 말았다. 국가에 반하는 모든 것을 빨갱이·종북으로 몰아 처단할 수 있는 절대마법이 권력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이 후진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주는 대신 애국자들의 참담한 말로를 보여주었으며, 예와 덕을 주는 대신 무례와 패륜을 주었고, 선의 선양宣揚보다는 악의 번영을 주었다.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8(재인용, 211)

 

함석헌 선생의 글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대한민국은 정의가 패배하고 무례와 폐륜을 일삼는 자들이 승리하는 곳이다. <베테랑>, <내부자들> 등의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도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승리한 것을 본적이 없는 탓이다.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한 후손은 떵떵거리며 살아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폐지를 주워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대한민국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기회주의적 행동을 일삼았던 자들이 애국을 논하며 대중에게 왜 애국하지 않느냐며 호통을 치는 곳이다.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이 과연 정도(征途)를 가고자 하겠는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쌓인 적폐(積弊)는 악의 번영을 예찬하고, 정도를 추구하는 이들을 칠푼이 취급하는 사회로 만들어버렸다.

 

자립하지 못하고 주인을 찾아 헤매는 노예 상태

 

조선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종주국을 찾아 헤맸다. 물론 당시 사대(事大)는 동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필요한 조처였다. 하지만 서구열강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러한 사대 관념은 독으로 작용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물론, 독립보다는 의존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게 만들었다.

 

84일 병합을 위한 비밀협상 자리에서 이완용의 비서이자 신소설 작가인 이인직은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29)

 

구시대적인 사대 관념을 일찍이 타파하고 독자적인 세계관으로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식견이 있었더라면, 이인직이 짓거린 저 따위 망발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대국에 휘둘려 한반도가 남북으로 쪼개지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 정부가 수립됐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단독 정부는 수립됐고 남북은 갈라졌다. 이후 대한민국의 종주국은 미국이 됐다. 이승만은 미국을 철저히 추종했고, 그것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1965년 체결한 한일기본조약도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렇게 졸속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5년의 위안부 협상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교두보로 일본을 낙점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납득하기 힘든 협상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얻는 해방은 한낱 주인을 바꾸어 섬기는 것이요. 형태를 달리한 노예 상황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하는 방향은 일본이 가르쳐준 것이요, 조직된 제도는 첨단적인 미국류의 모방이요, 운영 방식은 이민족을 통치함에 사용한 일제의 방식이니 우리의 문화를 어디서 찾겠는가? 이러고도 해방된 민족이라 하겠는가?

- 함석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19588(재인용, 282)

 

국제적인 외교관계에 있어 종주국이란 없다. 주권을 가진 국가라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위해 능동적으로 외교를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위안부 협상이 증명하듯, 대한민국은 강대국의 압력에 굴복해 굴욕적인 협상을 하고 말았다. 이것이 노예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함석헌 선생의 일갈이 가슴을 쿡 찌른다.

 

대한민국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알게 되는 것만큼, 절망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골수까지 썩어문드러졌다는 것만 재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비관적인 것 같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보다 비관적인 것은 없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저자도 대한민국을 쇄신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누가 보더라도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총체적 난국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의지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더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하는 자조 섞인 바람만 있을 뿐이다.

 

3달 후면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치러진다. 여당 대표는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180석이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한다. 운이 따른다면 개헌까지 가능한 200석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점친다. 야권이 분열하면서 서로 싸우느라 지리멸렬한 지금, 이루지 못할 소망은 아닐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JTBC 뉴스룸> 신년특집 토론에서 유시민 작가가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35%는 지지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으며 그러한 인간들이 만든 대한민국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세상, 헬조선이라 불리는 곳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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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잘 하든지 아니면 잘 태어나든지.”

 

영화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에서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대사다. 저 대사에서 잘 하든지에 감춰져 있는 함의는 이렇다.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철저히 기득권 계층이 주입하는 사고를 내면화한 기생충이 되든지, 아니면 기득권 계층의 자녀로 환생하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출세하려면 말이다.

 

환생은 불가능한 일이니 결국 노예가 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영화에서 저 대사의 당사자인 우장훈 검사(조승우 분)는 출중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뒷배가 없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위 높으신 분들의 뒤를 열심히 닦았지만 그들에게는 일개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공공연하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한국 사회의 뒷모습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성접대의 적나라한 묘사 등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능력의 소용없음에 좌절하는 우장훈 검사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 우장훈 검사가 느꼈던 좌절감을 현실의 내가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서일 것이다.

 

능력주의는 신화다

 

한국 사회에 사는 대부분은 노력해서 능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내면화하고 있다.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이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손쉽게 부를 차지한 사람보다 스스로 모든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자수성가한 사람이 더 대단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자수성가했다는 인물이 정말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을까. 최근에 읽은 <능력주의는 허구다>(사이, 2015)란 책은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대중이 매체를 통해 접하는 성공스토리 대부분은 재구성된 것이다. 요컨대 결과를 토대로 능력주의로 볼 수 있는 과정만 취사선택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세세히 들여다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성공에는 상당한 비능력적 요소가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산재한 여러 비능력적 요인들을 무시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능력 자체만 가지고는 힘들다. 능력을 계발할 시간과 자본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능력을 발견해줘야 하며, 능력이 사용될 만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이는 모두 비능력적 요소다. <능력주의는 허구다>는 이러한 비능력적 요소를 사회적 자본, 문화적 자본, 교육, 상속, 외모, 차별, 운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삶을 결정하는 비능력적 요소들

 

열심히 노오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동력을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잘해도 내 탓이며 못해도 내 탓이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할 수 있기에 도리어 가장 쉬운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노력=성공의 등식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면 성공한다는 부모의 잔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능력주의는 허구다>는 초장부터 이러한 믿음에 균열을 낸다. 한국 사회가 불평등을 해소할 유일한 창구라고 여겼던 학교와 교육을 불평등을 대물림하는 잔인한 매개체라고 명명한다. 부모는 외면하고 있을지 몰라도 당사자인 학생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풍족한 집안에서 자란 친구가 공부도 훨씬 더 잘한다는 사실 말이다. 상위 계층의 학생들이 명문대에 진학할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로 증명된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가난한 학생이 명문대에 진학했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가난한 학생들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며, 이러한 환경은 학업 성취도를 저하시키는 요소로 작동한다. 대출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부유층 학생들은 좀 더 학업에 매진할 시간이 주어지고 이로 인해 성취의 측면에서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74) 이러한 비능력적 요소로 인해 가난한 학생들은 취업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간신히 취업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스펙을 갖췄다고 치자.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사회적 자본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본이란 인맥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취업경쟁에 있어 인맥은 취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강력한 요소다. 소위 알음알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즉 일자리를 소개시켜줄 수 있는, 또 능력이 있다고 증명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알지 못한다면, 능력은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

 

결국, 누구를 아는가가 중요하다.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는 모든 구직자 가운데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해당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얻은 사람이 56%에 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략) 연구에 참여한 응답자 중 개인적인 인맥이나 공식 경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지원한 사람은 18퍼센트에 불과했다. 채용 과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는 일자리도 많다.(92)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하늘이 내려준 비능력적 요소도 있다. 단적인 예로 매력적인 외모를 들 수 있다. 매력적인 외모는 타고난 것이며, 이는 완벽한 비능력적인 요소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를 선호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기회 구조”(270)를 형성한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취업성형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다. 하지만 성형이 타고난 외모를 이기기란 쉽지 않다.

 

또 태어난 시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기성세대는 요즘 세대에게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기성세대가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들이 좋은 타이밍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저성장의 늪에 빠졌을 때 태어난 세대보다 과거 한국이 초고속 성장을 하고 있을 때 태어난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한 채, 노력이라는 잣대로만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정한 출발을 넘어, 공정한 도착으로

 

인정하든 인정 못하든 간에 삶은 비능력적 요소에 의해 결정될 확률이 크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공정한 출발선이 주어진다는 전제만 있다면 각자의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진보적 매체라는 <한겨레>조차 2016년 신년기획으로 청년에게 공정한 출발선을이라는 제목을 내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언컨대 공정한 출발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부모는 자식의 성공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또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은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다. 이처럼 비능력적 요소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소비에트 연방처럼 공산주의를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다. 공정한 출발선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뜻이다.

 

이제 공정한 출발선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패러다임을 공정한 도착으로 전환해야 한다. 누진세 상속세 등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세금을 도입하고, 강력한 복지제도의 구축이나 기부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부를 재분배하며, 노동·계층 운동을 통해 불평등을 억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을 기르자는 것이다. 언제까지 노오력에 목메고 있을 텐가. 능력주의 신화는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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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6.01.07 22:5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사실 능력 자체도 타고나는 것이 크죠. 진짜 공부로 타고난 사람들은 어릴때부터 천재 소리 들으면서 대학교수 하고 승승장구 하잖아요. 반면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나면 불리한 신체적 조건 때문에 공부를 하고 학습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많이 어려워지지요.

  2. H 2016.06.05 23:15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감합니다. 애초부터 똑같은 출발선은 없다는 것을... 그래도 그 격차를 줄여나가도록 노력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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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다.”

 

며칠 전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해 이렇게 썼다. 대학원 박사과정 지원 원서를 대학원 행정실에 제출하고 난 후였다.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내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딸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페이스북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스스로 들어갔다고 선언한 것은 어떠한 불안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진로 때문에 불안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또래들이 어떤 미래를 살까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길은 이미 정해졌다고 믿었고 주변 또래들은 나를 부러워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이 서른이 다가온다는 부담, 내가 전공하는 주제에 관한 사회의 부정적인 평가, 선배가 처한 상황 등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확고부동한 믿음에 점점 실금이 생겨났다. 그것은 석사학위를 따고,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대학의 계약직 직원으로 일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직접 번 돈을 손에 쥔다는 경험은 책을 읽으면서 얻는 깨달음처럼 달콤했다. 그래도 믿음을 완전히 깨뜨리고 불안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한숨이 습관이 될 만큼, 나를 불안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하나의 책이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책표지 ⓒ은행나무

 

허울을 벗긴 대학의 민낯

 

바로 지방시라고도 불리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은행나무, 2015)란 책이다. 지방시는 3091201호라는 특이한 필명의 저자가 쓴 책으로, 대학 내 대학원생이자 시간강사가 처한 상황을 고발하고 있다. 저자는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글을 풀어내는데, 거기에 가공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날것의 내용이 더해지니 어떤 감성적인 글보다도 가슴 깊이 절절함이 박혀들었다. 나는 저자와 같은 처지라 더 공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방시의 절절함을 나만 느낀 것은 아닌 듯하다. 지방시 관련 기사가 언론에서 쏟아지고 있다. 매일 들춰보는 신문들의 오피니언면에도 연일 관련 칼럼이 게재될 정도다. 대학이라는 허울에 가린 열악한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처우가 충격적이기도 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아마 시간강사 해고법이라 불리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다음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어떤 집단을 보호하겠다며 만든 법안은 모순적이게도 모두 그 집단을 파괴했다. 기간제법, 파견법 등 비정규직 보호법이 그러했다. 시간강사법 역시 유예되기 이전까지 동일한 방향으로 흘렀다. 과거를 답습하는 법의 시행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으로 연명하던 시간강사 대부분이 해고되고, 지도교수의 애정을 놓고 벌어진 충성경쟁에서 승리한 일부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물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23일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시간강사법 시행을 2년 유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긴 했다. 아직 국회 본회의가 남아있긴 하지만 사실상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현상유지일뿐더러, 2년 뒤에는 또 같은 일을 겪어야한다. 나도 2년 뒤 박사과정을 수료하면 시간강사의 삶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처지라, 걱정이다. 이제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지방대 시간강사라도 될 수 있을까

 

책을 통해 얼핏 바라본 저자의 삶에서 느낀 것은 반반이라는 감정이었다. 등록금이나 밥벌이는 같은 인문계열 전공이라 얼추 비슷했다. 하지만 저자의 대학원 생활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인적인 것이었다. 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천국을 거닌 셈이었다. 제자의 사정을 아는 교수와 좋은 동료 덕에 편한 대학원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저속하지만 이상한 안도감도 들었다.

 

한편 저자의 시간강사 생활을 엿보며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는 이미 시간강사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책을 통해 본 저자는 좋은 선생이었다. 학생을 이해하려고, 학생을 위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글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시간강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본()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가 시간강사로 활동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년 뒤 시간강사법이 원안대로 통과될 수도 있고, 내가 속한 학과가 인문계열이라 곧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말 그대로 반반이다. 안도감과 부러움이 교차했다. 지방시가 불러일으킨 긍정과 부정이 뒤섞인 감정이 앞으로 있을 대학원 박사과정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고만 것이다. 이미 지방대 시간강사인 저자가 버티지 못한 삶을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라도 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에 휩싸인 내가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고, 남은 것은 다가올 캄캄한 미래를 어떻게든 견뎌내는 일뿐이다.

 

함께 버텨낼 사람만 있다면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었을 여러 인연들과 나는 점차 이별했다. 내가 기댈 곳은 몸담고 있는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인문계 대학원에는 남자가 부족했고, 있다 하더라도 나와 또래인 이들은 거의 없었고, 더욱이 친구가 될 동갑은 전혀 없었다.”(57)

 

지방시의 모든 내용에 공감했지만, 유독 눈길이 간 내용은 친구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 역시 남자가 부족하고, 또래가 거의 없고, 동갑인 남자는 물론 여자도 전혀 없다. 또래가 아니면 아무래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또 관계없음에서 오는 외로움은 사람을 좀먹고 모든 의욕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물론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공부한 것을 토대로 서로 대화하고 비판하는 일도 중요한 공부 방법 중 하나다. 또 같은 길을 함께 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큰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이는 저자가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서 버텨내고 있었다는 허벌이란 친구가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동지적 인간관계는 중요하다.

 

얼마 전 페이스북을 뒤적거리다 지방시의 저자가 대학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접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공감해줄 것이라 믿었던 동료의 타박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열악한 환경은 견딜 수 있어도 인간적 실망은 버티기 힘든 법이다. 동료에게마저 버림받은 집단에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대학은 한 명의 뛰어난 연구자와 좋은 선생을 함께 잃었다.

 

앞으로도 대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편승해 끊임없이 줄이고 자르고 통폐합할 것이다. 또 대학에 적을 둔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듯 엄혹한 대학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은 함께 버텨낼 사람을 찾는 것 외에는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이 체온을 나눌 때 눈보라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와 허벌의 관계처럼, 내게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가 있다. 이 글을 빌어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지은이 - 309동1201호

  출판사 - 은행나무

  출간일 - 2015년 11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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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6.01.02 06:08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흠.. 잘지내고 있는거죠?..
    올해도 꼭! 건강하게 우리 잘 버텨봐요.

    글을 보니..맘이 너무 아파요.
    밥 잘챙겨먹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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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이 늘었다. 내뱉지 않으려 노력해봤지만 한숨은 무의식적이다. 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믿진 않지만 내년이면 아홉수라 찜찜한 탓일까. 아니면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원서를 넣어야할 때가 머지않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잠시 쉰다는 핑계로 1년간 일했던 조교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해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지만 전부 마땅치 않다.

 

평소 억지로라도 했던 독서도 한동안 그만뒀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쳐다보는 데 일상 대부분을 소비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업무적인 사고까지 터져버렸다. 정신은 혼미했고 시간은 그저 그랬다는 듯이 흘러갔다. 사고는 가까스로 수습했다. 지친 정신을 달래려 얼마간의 휴식을 취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달이 지났다.

 

되찾은 정신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쉬운 깨달음을 하나 툭 던져줬다. 네가 느끼는 의문들의 원인은 모두 불안 때문이라고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불안을 견디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독서였다. 마침 여유가 생겨 한동안 잡히지 않던 책을 집어들 수 있었다. 여러 책을 읽어나갔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힌 건 <비정규 사회>란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내가 겪고 있는 불안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비정규 사회>, 책표지 ⓒ후마니타스


불안은 어떻게 영혼을 잠식하나

 

얼마 전 대학언론사에서 함께 일했던 동기를 오래간만에 만났다. 동기는 방송국에서 프리랜서 FD로 일하고 있었다. 동기는 방송국 PD 공채시험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일을 그만두면 보호장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는 기분이 들어 두렵다고 했다. 불안하다고 했다. 동기의 이야기를 담담히 듣고 있었지만 나도 같은 기분이었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쓸쓸히 죽어가는, 비극적이지만 특별하지도 못한 그저 그런 미래가 떠올라서다.

 

<비정규 사회>에서 그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도 처참하다. 마땅히 주어진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을 저당 잡힌 비정규직. 잘릴까봐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제대로 된 공간에서 쉴 수도 없는 비정규직. 정당한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비정규직. 이것이 불안한 현실이며 절망적인 실재다. 디스토피아가 존재한다면 모두가 불안에 사로잡혀 사는, 바로 지금 한국의 모습일 것이다.

 

세상을 속여 이익을 취하는 부류는 나나 동기가 겪는 불안이 극복될 수 있다며 거짓된 말들을 풀어놓는다. 자기계발이나 힐링 타령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안은 극복될 수 없다. 불안은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부터 덮쳐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를 통제할 수 있는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불안은 다만 완화될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의 능력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불안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폭력이 된다.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이 한 언론사의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때는 왜인지 모를 거부감이 몰려왔다. 아마도 천재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소위 노오오오력하라는 꼰대에게 소비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꽉 막힌 현실까지 뚫어낼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예외다. 그들은 하늘이 콕 집어 지정한 사람이니까. 앞서 언급한 조성진에서부터 피겨스케이팅에서 전설적인 족적을 남긴 김연아, e스포츠 종목 중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독보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Faker 이상혁까지. 왜 이들을 빗대어 청년들에게 노력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며 폭력을 휘두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각박한 현실은 능력주의가 환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데 말이다.

 

지금 연대가 정말 가능할까

 

앞서 불안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화될 뿐이라고 했다. 불안의 완화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회만이 가능한 일이다. 외부에서 엄습해오는 불안은 사회가 아니고서는 막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이에게 스스로 불안을 극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동이 불안정하고 실업이 만연한 시대일수록 일자리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존은 고용과 임금을 통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생존권은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보장받아야 할 독립적인 권리이다.”(145)

 

하지만 세상은 생존권 보장은커녕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며 닦달한다. 여기에다 자본가,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가상의 신분질서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이간질한다. <비정규 사회>는 말미에서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은 암울하다.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말 속에 암울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 추세라면 개인은 모두 파편화돼버리고, 연대의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다. 책은 연대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으나 희망의 가능성은 점점 옅어지고 있는 아이러니라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연대는 파편화된 개인들 모두의 몰락 이후에서야 간신히 피어날 지도 모르겠다. 마르틴 니뮐러가 남긴 말이 폐부를 찌른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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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목 - 비정규 사회

  지은이 - 김혜진

  출판사 - 후마니타스

  출간일 - 2015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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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5.11.28 00:52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꼰대들은 얼마나 더 많이 노력해야 정말 노력했다고 인정해줄까요? 요즘 어지간한 사람들 다 먹고살기 위해서 어지간히 노력해요. 노력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밥벌이가 안되는 세상이니까요. 거기서 더 노력하라면 잠을 줄이거나 등의 방법을 써야 하는데 이런 방법들은 건강에 치명적이죠. 정신분열증 같은 심각한 정신병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잠을 너무 적게 자고 너무 많이 일하는 것이라고 해요. 난 정말 꼰대들이 하라는대로 진짜 열심히 해서 잠도 줄이면서 노력했는데 결국 정신분열증 걸려서 인생이 망했다 이러면 과연 그들이 책임이나 져 줄까요? 그런 꼰대들이 진짜 노력의 댓가로 병걸려서 정신장애인된건 모르고 정신장애인 차별은 오히려 더 많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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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 동네 뒷산으로 가는 소풍이 정말 싫었다. ‘동네 뒷산이라는 멋없는 호칭처럼, 그곳은 초등학교 때 나에게는 진부함 그 자체였다. 그때의 나는 소풍이라면 마땅히 새로운 곳을 가야하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한나절도 되지 않는 소풍은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에는 너무 짧았고, 결국 소풍 장소의 대부분은 동네 뒷산이 차지했다.

 

동네 뒷산은 오봉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마 다섯 개의 봉우리가 동네를 감싸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는 소풍을 지루하게 만든 오봉산을 마냥 싫어했다. 하지만 20여 년간 한 동네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오봉산은 이제 추억이 됐다. 이따금 오봉산을 바라보면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곤 한다.

 

오봉산은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 동안 함께 했지만, 나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 정도의 의미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번에 오봉산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최원석 교수의 <산천독법>을 읽고 나서다. 책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산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산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인문학적 성찰은 무엇인지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한다.


<산천독법>, 책표지 ⓒ한길사

 

주산, 마을을 설계하는 핵심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지세가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면하여 있다는 뜻이다. 풍수에 따르면 이러한 배산임수 지형은 마을이 들어설 만한 이상적인 터라고 볼 수 있다. 소위 말하는 명당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만 해도 주거지 뒤편을 산이 감싸고 있고, 앞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규모가 있는 동네라면 대부분 배산임수 지형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책에서는 이러한 동네를 등진 산을 주산이라고 부른다. 내가 사는 동네라면 오봉산이 주산일 것이다. 주산에 따라 동네의 모습이 바뀐다. 배산임수라는 명당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주산을 등져야만 하니까 말이다. 그만큼 주산은 중요한 존재였다. 심지어 조선 왕실에서는 주산이 어디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주산 논쟁을 끝내기 위해 세종이 직접 산에 올라 답사까지 했다니 주산의 중요성을 알만 하다.

 

일찍이 조선 초 한양 천도 당시에 하륜의 무악(안산) 주산론이 있었고, 야사이지만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론도 전한다. 그때 만약 주산을 달리 정했다면 한성의 공간구조는 전면적으로 달라졌을 테고, 지금의 서울 모습과는 딴판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주산이 중요한 이유는 공간디자인을 결정짓는 기준점이자 방향축이기 때문이다.”(본문 22)

 

조산, 없으면 만들어라

 

처음에 우리 조상들이 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이라는 마음부터 들었다. 찬찬히 책장을 넘기다 보니 산을 만들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됐다. 산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확실히 느꼈다. 산이 없어 산을 만들기까지 한 마음에 책을 읽으며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단 몇 숨도 쉬지 못하면 죽지만 공기를 느끼지 못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지나치는 것에 지중한 가치가 있다. 조산이 그렇다. 조산은 마을 입구에도 있고, 고갯마루에도 있다. 돌무더기로도 있고, 숲으로도 있으며, 장승이나 솟대, 심지어 남근석의 모습으로도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모두를 조산이라고 한다. 형태는 달라도 기능이 같은 산의 상징이라 그렇다.”(본문 39)

 

산을 만드는 행위를 조산(造山)이라고 한다. 산은 다양한 이유로 만들어졌다. 겨울의 찬바람을 막거나 흉한 모습을 가리는 등의 기능적인 면도 있지만 풍수적인 영향이 크다. 산이 없는 평지에 마을이 있으면 마을 뒤편에 숲을 만들어 산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마을 주산의 형태에 따라 필요한 산을 만들기도 했다. 주산이 용의 형상이라면 여의주를 상징하는 조산을 만드는 식이다.

 

풍수적으로 용의 형국에 필요한 여의주, 봉황의 형국에 필요한 알, 배가 가는 형국의 돛대 같은 상징성도 갖는다. 마을에서 마주보이는 산의 특정 부위가 음부 형상으로 보이거나 여근 모양의 바위가 있을 경우에는 음풍을 막는 남근석 조산도 있다”(본문 48~49)

 

산은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무심코 산을 오른다. 하지만 단풍을 보기 위해, 다이어트를 위해, 건강을 챙기기 위해 산을 오를 뿐, 산을 읽기 위해 오르진 않는다


앞서 산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만 이야기했지만 산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산은 수많은 동물과 식물을 품고 있다. 산은 수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 산은 무궁무진하다. 산은 우리가 그것을 읽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시간은 흘러가버려 허망하기 짝이 없다. 공간은 무색으로 텅 비어 있어 무정하다. 그러나 산천은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그 무엇이다. 모두가 차곡차곡 저장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나는 산천을 거대한 메모리라고 생각한다. 역사도 조상도 자연생태도 모두 담겨 있고 또 앞으로 담길 그 무엇이다. (중략) 산의 보장(寶藏), 산천메모리다.(본문 11)

 

언젠가 동네 뒷산에 오를 여유가 생긴다면, 산에 올라 그 산이 품고 있는 보물들을 캐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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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목 - 산천독법

  지은이 - 최원석

  출판사 - 한길사

  출간일 - 2015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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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가 우리의 일상을 점령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모두 스마트폰을 붙들고 SNS의 뉴스피드를 확인한다. 식당에서 음식이 나온 후 SNS에 올리기 위한 사진을 찍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됐다. 대한민국에서 소위 ‘SNS 삼대장이라 불리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는 이제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이 향유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SNS를 확인하고, 잠들기 전까지 SNS를 확인하는 시대다. SNS가 일상에 빼곡히 틈입한 것이다. 때문에 기존에 없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남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편집한다. SNS에 올라오는 남들의 좋은 모습을 보며 실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한다.

 

자신과 남을 계속 비교하면서, SNS에 남들보다 더 나은 사진이나 더 자랑할 만한 사진을 강박적으로 올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자투리 시간이 생길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SNS를 확인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SNS를 확인하느라 매일 몇 시간씩 낭비하고 있다. 한 마디로 SNS중독된 것이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인 수재나 E. 플로레스의 <페이스북 심리학>SNS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함에 따라 어떤 문제들이 나타났는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물론 <페이스북 심리학>은 제목처럼 분석대상을 페이스북에 한정하고 있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월 이용자 수가 10억 명(2012년 기준)에 달하고, 미국의 대다수 시민이 이용하기 때문에 이를 SNS 일반까지 확대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페이스북 심리학>, 책표지 ⓒ책세상

 

자기 편집의 위험성

 

살이 찐 게 걸리는가? 문제없다. 5년 전에 찍은 사진을 올려라. 그게 먹히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포토샵이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죄다 편집 가능하다. 우리는 마음껏 자기 삶을 재창조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우리의 정체성을 재창조할 수 있는 힘은 정말 기이하다.”(본문 45)

 

‘SNS에 올리는 사진은 수십 장 찍은 사진 중에 가장 잘 나온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여러 사진 중에서도 셀카(셀프카메라)를 올릴 때 가장 공들인다고 한다. 나였다면 차라리 안 찍고 말았을 테다. 하지만 가장 잘 나온 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일견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버려진 수십 장의 사진에 찍힌 것이 과연 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를 찍은 사진이 잘 나왔든 못 나왔든 간에 그것은 모두 . 하지만 SNS가 우리의 일상을 점령해나갈수록 SNS는 편집한 나를 진짜 나라고 믿게 만든다. SNS상의 나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해주지만, 그에 비해 현실의 나는 비루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포스팅은 단순히 자신의 하루를 보여주고 업데이트하는 것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좋은 면만을 올리고 나쁜 면은 숨겨야 한다는 압박감을 점점 더 느끼고 있다.”(본문 43)

 

SNS에 올려진 나를 진짜 나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현실의 나와의 괴리는 점점 커진다. 결국 화려한 SNS에서의 나와 상대적으로 비루한 현실을 비교하면서 우울증에 빠진다. 이것이 심해지면 비루한 현실을 외면하고 SNS의 화려한 나에게 중독되는 것을 선택한다. 실제 자신보다 자신의 SNS 아바타를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10대가 위험하다

 

한국에서 SNS가 발달하고 대부분의 사람에게 스마트폰이 쥐어진 것은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현재 SNS가 일상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20대 후반에 접어든 나는 일상을 망가뜨릴 만큼 SNS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10대는 다르다. 지금 10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을 접하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는 세상이다. 아이들이 울면 이제 안고 달래주기보다 뽀로로 영상이 나오는 스마트폰을 건네줄 정도다. 이러한 시대를 어린 시절부터 겪어온 이들을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즉 현재 10대들에게 디지털은 삶의 터전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를 비롯한 어른들은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이 있다. 어린 시절을 디지털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에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10대는 다르다. SNS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SNS를 자신의 삶에 일부라고 여길 확률이 높다. 때문에 SNS가 주는 여러 부정적인 영향력에 아주 쉽게 노출된다.

 

특히 자아정체성을 형성해야만 하는 10대들에게 앞서 언급한 자기 편집의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자아정체성을 제대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나를 직면해야 한다. 하지만 SNS 활동에서 요구되는 자기 편집은 이를 가로막는다.

 

페이스북의 기능들은 자기 정보를 편집하고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게 만들었고 이는 우리의 자아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자기 가치감과 관련된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다. 극단적인 수준에서는, 셀카를 포함하여 자신이 올리는 포스팅에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에 따라 자기 가치를 규정한다. 자기 편집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점점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순수한 자기표현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진짜 자신을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본문 259)

 

현재 10대들은 이러한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특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교육만 받는 학생들은 성찰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SNS 환경 역시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부터라도 주체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SNS를 비롯한 디지털 세계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용당하기보다 이용하기를

 

SNS에 지나치게 빠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의 10대가 디지털 네이티브인 터라 조금 더 위험할 뿐이다. SNS는 단지 SNS일 뿐이다


물론 SNS에 올린 자신의 편집된 삶이 SNS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행복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 직면하는 순간 무너져 내리고 마는 신기루일 뿐이다.

 

더욱이 SNS에 올리는 삶의 일부는 스스로의 삶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삶일 뿐이다.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은 공허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릴 적 부모님이 원하는 삶을 살다 지쳐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SNS라는 타인에게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우를 범할 것인가. 행복은 스스로 결정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페이스북에 무엇을 올릴지를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근거하여 결정하면 그들에게 당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힘을 넘겨주는 셈이다.”(본문 241)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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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목 - 페이스북 심리학

  지은이 - 수재나 E. 플로레스

  옮긴이 - 안진희

  출판사 - 책세상

  출간일 - 2015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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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5.10.27 23:25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하긴... 저만 해도 SNS에 올릴 사진 찍으려고 스튜디오까지 가서 사진찍었으니 저도 SNS중독일수도... 근데 SNS의 장점도 많아요 SNS에는 업무와 관련된 중요한 최신정보들도 꽤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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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빚지는 걸 상당히 싫어한다. 돈 빌리는 것은 물론, 누구에게 도움을 받는 것조차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낯선 지역에서도 길 묻는 것이 싫어 눈이 빠지도록 스마트폰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요즘 들어 빚지는 맛(?)을 알게 됐다. 그 맛의 한 주범은 바로 신용카드다.

 

대학 졸업 후 일을 하면서 영업원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신용카드를 만들게 됐다. 귀찮음을 피하려 만든 탓에 절대 쓰지 않으려 했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어쩌다 한 번씩 신용카드를 긁을 일이 생겼고, 어쩌다 한 번씩 신용카드를 긁는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빚지는 걸 상당히 싫어하던 나는 이제 필요할 때마다 빚을 내는 일이 익숙해졌다.

 

이 같은 상황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업원이 들러붙어 신용카드를 만들어달라고 애원한다. 간단하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대부업 광고가 텔레비전에서 범람한다. ‘빚내서 집사라는 정부의 정책이 쏟아진다. 사방에서 빚을 권하고, 빚잔치를 벌이라고 떠들어댄다. 빚은 이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친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가계부채가 1200조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숫자로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과 갈수록 무뎌지는 현실감각뿐이다. 최근 빚에 무감각한 사회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가 책을 냈다. 바로 빚 권하는 사회 빚 못 갚을 권리(책담, 2015). 제윤경 대표는 빚 못 갚는 사람을 비난하기보다 빚 권하는 사회를 타파하자고 역설한다.


<빚 권하는 사회 빚 못갚을 권리>, 책표지 ⓒ책담

 

빚진 자를 못 참는 한국 사회

 

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가 있다. 빚 독촉에 시달리는 주인공과 질릴 듯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추심업체가 그것이다. 최근 드라마에서는 조금 뜸한 것 같지만, 예전에는 깡패의 행색을 한 남자들이 채무자에게 찾아와 주변의 집기를 집어던지며 협박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그러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주변에서는 혀를 차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협박을 당할 정도의 빚을 왜 빌렸냐는 힐난이었다. 그것은 빚을 지고 갚지 않는 자는 저런 협박을 당해도 싸다는 긍정의 표시와 다름없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빚을 지고 갚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적 매장까지 당할 수 있는 엄청난 죄다.

 

현장에서 상담사들이 마주하는 채무자는 영락없는 죄인의 모습이다. 간혹 억지를 부리며 빚을 없애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채무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한없이 늘어뜨린 모습이다.”(284)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빚진 자는 제대로 서 있을 곳이 없다. 스스로 죄인이라 자책하며 양지보다는 음지를 배회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채무 변제를 도울 수 있는 여러 정책에 접근하는 것까지 막는다. 빚진 자를 품어줄 수 있는 사회로 변하지 않는다면 빚진 자는 빚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빌려주는 자의 도덕적 해이

 

빚을 지는 사람들은 보통 네 단계를 거친다. 먼저 제1금융권의 문을 두드린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제2금융권으로 눈을 돌린다. 여기서도 대출이 불가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대부업체로 찾아간다. 대부업체도 바닥이 아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은 불법사채에까지 손을 댄다. 바닥을 친 사람의 인생은 파탄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제삼자는 왜 저렇게 과도한 빚을 지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제삼자의 시각처럼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하다. 물에 빠지면 허우적대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더 합리적임에도 대부분 허우적대고 만다. 지금이야 가족이라도 보증은 서주면 안 된다는 인식이 박혔지만, 예전에는 보증 서줬다가 패가망신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빚을 지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돈을 찾아 헤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건, 물에 빠진 것과 다를 바 없다. 살기 위한 본능만 존재하는 사람에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공허하다. 그렇다면 빚을 지려는 사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빌려주는 자일 수밖에 없다.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을 채무 노예로 삼는 약탈적인 행위일 뿐이다. (중략)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자금 수혈이 아니라 근본적인 소득 보장과 일자리 등의 복지 서비스다.”(115~118)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신용카드를 억지로 손에 쥐어주고, 전화 한 통이면 간편하게 대출할 수 있다며 호객행위를 일삼는다. 빚을 끊임없이 권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금융권은 그것을 활용해 대출 가능 여부를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금융권은 생각보다 쉽게 돈을 빌려준다.

 

우리는 투자가 실패하면 투자를 잘못한 자신을 탓하지 투자한 곳의 실패를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융권은 자신의 투자실패를 탓하기보다 투자한 곳의 실패를 탓하며 돈을 내 놓으라 윽박지른다. 애초에 부실한 곳에 투자를 하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닌가. 금융권은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빚진 자를 옥죄고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기 바쁘다.

 

채무자가 빚을 원활히 갚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 하고 직장 생활에 지장이 없어야 한다. 채권자가 원하는 것이 채무 상환이라면 채권자의 행동은 더더욱 채무자의 직장 생활을 보호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나라 법률 체계와 채권자들의 횡포를 보면 마치 채무자를 괴롭히는 것이 추심의 목적인 듯하다.”(248)

 

빚 권하는 사회를 타파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개인이 감당해야할 짐이 너무나 많다. 정부는 국민을 챙기기보다 땅을 파고 삐까뻔쩍한 건물을 짓기 바쁘다. 빚진 자에게 가혹한 사회가 된 것도 아마 개인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빚 문제를 해결해줬다면 이렇게 가혹한 도덕적 단죄가 필요했겠는가.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를 외친 후보가 당선된 지도 이제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딱히 달라진 건 없어 보인다. 이념 전쟁만 일삼는 정부를 보니 앞으로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 정부가 하지 않으니 또 개인이 나설 수밖에 없는 듯하다. 빚 권하는 사회를 과연 타파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짊어진 짐이 너무나 무겁다.



 

책 정보(책표지를 클릭하세요)


  

  책목 - 빚 권하는 사회, 빚 못갚을 권리

  지은이 - 제윤경

  출판사 - 책담

  출간일 - 2015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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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BlogIcon 책덕후 화영 2015.10.22 22:45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진짜 빚을 질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 사업하는 사람 아니면 중증 장애인을 부양해야 한다거나 자신이 중증 장애인이거나 하는 정도의 심각한 병 또는 장애가 있는 사람 정도죠. 그런 면에서 전자는 망해도 재기할만한 여지가 있지만 후자는... 건강이 안따라주는데 일해서 돈버는게 가능하겠습니까... 갠적으로 정책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에는 동의합니다. 후자같은 사람에게 진짜 필요한 건 제대로된 복지정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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