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관심이 부족한 지역민들


많은 사람들이 지방(혹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서울 및 수도권 중심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운영이 서울 및 수도권 중심주의를 유발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에 관심을 꺼야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지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부터 그 관심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전공했고, 또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부산 곳곳에 숨어 있는 부산의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많은 시간을 이 작업에 할애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를 여행하고 그곳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고자 한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부산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내고, 풀어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작업의 첫 장소는 부산 중구 중앙동에 소재한 40계단이다.


부산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 내리면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가 바로 보인다. 이 거리는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을 거쳐 40계단문화관과 팔성관광까지 약 450m가량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한국 전쟁 시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유서깊은 40계단 주변을 50~60년대 분위기에 맞도록 재현하여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40계단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를 네 번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한국전쟁의 아픔, 판자촌


대한민국의 모든 인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부산은 곳곳에 판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마저도 없는 피난민들은 바람과 비를 피하기 위해서 천막에서 살거나 잡동사니들을 모아 만든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집에서 살고 있었다. 40계단은 이 판자촌으로 올라가기 위한 통로 중 하나였다. 이 부근에 살고 있었던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이 40계단을 지나갔을 것이다. 그 통한의 아픔과 설움이 배어있는 것이다. 지금 그 자리에 가 보아도 얼기설기 얽혀있는 집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판자촌은 아닐지 몰라도 구불구불 길들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 판자촌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 어마어마한 규모의 판자촌 




▲ 안쓰럽기까지한 천막촌

 

 

1953년 발생한 국제시장, 부산역전 대화재로부터 1954년 용두산 대화재로 부산 역과 부산 우편국을 비롯한 40계단 일대는 폐허처럼 변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판자촌 역시 수천여 채가 불타고 4만여 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했다.

 



▲ 부산역 앞 대화재 




▲ 용두산 대화재

 

 

이 대화재들로 인해 중앙동 주변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복구 작업이 진행되면서 40계단은 역시나 살아남았다. 건물들이 살아남았다면 원래 그 자리로 복구되었겠지만 건물 대부분이 불타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시가지를 새로 조성하면서 40계단의 위치는 원래 자리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구되었다.

 

 

현재 40계단의 모습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오프닝 장면



6. 25 전쟁의 기억이 점점 사라질 무렵 이 40계단의 존재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점점 사라져갔다. 그런데 19997'인정사정 볼 것 없다'라는 영화가 큰 히트를 치면서 덩달아 40계단도 유명해졌다. 왜냐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오프닝 장면의 배경으로 40계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유명세를 이어 20044월에 부산광역시 중구에서 이 40계단 일대를 문화관광테마거리로 지정해 새로이 조성했다. 피난민과 부두 노동자의 애환이 담겨 있는 이곳에는 1950 ~ 1960년대 분위기가 재현되어 있다. 1953년 부산역대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옛 부산역을 주제로 한 기찻길과 피난민을 실어 나르던 부산항을 주제로 한 바닷길로 조성되어 있으며, 거리 곳곳에 옛날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조형물

 


 

▲ 1950대 배경 조형물



문화관광 테마거리를 지나 40계단을 오르면 40계단 문화관을 볼 수 있다. 40계단 문화관은 20032월 개관했다. 이곳은 중구 동광동에 지상 6층 규모로 지어졌고 건물 5층과 6층에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 부산의 시대상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공간을 마련하였다. 5층에는 상설전시실이 있어 피난민이 넘치던 한국전쟁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검정고무신과 양철물동이, 그리고 석탄난로 위에서 점심시간을 기다리던 알루미늄 도시락통, 물지게와 풀빵기계, 트랜지스터라디오 등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게다가 40계단에 얽힌 향수와 애환을 지역원로와 문화예술인들이 목소리로 들려주는 옛날 전화기까지 있어 그 느낌은 더욱 생생하다. 그리고 6층에는 특별전시실이 있는데, 현재 '잊혀진 기억, 살아있는 문화'라는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다.

 


40계단의 재조명

 


40계단은 이제 그저 40개의 층층대로 이루어진 계단이 아니다. 그 층 하나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그리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세대에 이르러서는 6. 25 전쟁이라는 사건을 되돌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40계단이 있기 때문에 우리네들이 그 아픔을, 그 슬픔을, 그 고통을, 그 절망감을 느낌으로나마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길 바라듯이, 40계단을 지나다닌 많은 사람들도 당신들을 기억해주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40계단을 바라보면서 6. 25 전쟁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위를 오르내린 이들을 기억하자. 40계단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를 과거로 이어주는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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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4.03.01 08:11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40계단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2. BlogIcon 지식전당포 2014.03.10 01:08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잘 보고 갑니다~ 추천 누르고 갈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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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관심이 부족한 지역민들


많은 사람들이 지방(혹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서울 및 수도권 중심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운영이 서울 및 수도권 중심주의를 유발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에 관심을 꺼야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지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부터 그 관심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전공했고, 또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부산 곳곳에 숨어 있는 부산의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많은 시간을 이 작업에 할애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를 여행하고 그곳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고자 한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부산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내고, 풀어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작업의 첫 장소는 부산 중구 중앙동에 소재한 40계단이다.


부산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 내리면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가 바로 보인다. 이 거리는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을 거쳐 40계단문화관과 팔성관광까지 약 450m가량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한국 전쟁 시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유서깊은 40계단 주변을 50~60년대 분위기에 맞도록 재현하여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40계단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를 네 번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40계단이 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의 애환


40계단은 비록 계단길이지만 층계수가 많지 않은데다 대청로 방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또한 상업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서 평소 많은 왕래가 있던 길이었다게다가 이 계단 위에 오르면 영도다리와 부산항 부두가 한 눈에 조망되는 곳이기도 했다이러한 40계단은 슬픈 말이지만 1950년에 6. 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민들에 의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북한군을 피하기 위해 끝없이 남쪽으로 향하던 피난행렬이 전력의 열세로 끝없이 밀리던 국군이 부산까지 후퇴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의 끝자락 부산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 부산으로 가는 피난길



6. 25 전쟁으로 인하여 졸지에 피난민 신세가 된 많은 사람들은 '경상도 아가씨' 노래 가사 그대로 40계단에 걸터앉아 영도다리와 부산항에 정박해 있는 많은 배들을 보면서 피난살이의 고달픔을 달래고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현실은 전쟁 중이었고 부산은 포화상태를 넘어 흘러넘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했다.

 

당시 부산에 모여든 피난민들은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고 누일 집이 없어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번화가였던 40계단 일대에 모여 살며 생계의 방편을 강구한 것이다. 그리고 또 40계단에 모인 이유가 있다. 한국군을 지원하고 있었던 UN군에 의해서 수많은 보급물자가 부산항에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당시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고 있던 상황이라 물자가 들어올 곳은 부산항 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메말라가고 있던 부산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고, 피난민들은 구호물자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부산항 근처의 40계단에서, 또한 동광동과 영주동 판자촌으로 가는 길목인 이 40계단에서 모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40계단 일대는 피난민들의 전쟁터이자 안식처였다.

 



▲ 당시 40계단의 모습



'얌생이 몬다'의 유래


피난민들은 이 곳에서 시중에 흘러나온 구호물자를 파는 장터를 벌였다. 이 장터의 구호물자들은 부두 길 주변에서 판자촌을 이루고 있던 피난민들이 바로 앞 부두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몰래 훔쳐서 내다 팔았던 것들이었다. 피난민들의 이러한 행위들 때문에 이때 '얌생이 몬다.'는 유행어까지 생긴다.

 

6. 25 전쟁 당시 부산에서 어떤 사람이 방목한 염소를 찾으러 미군부대에 갔는데, 그곳을 나올 때 약간의 물건을 훔쳤다고 한다. 그런데 발각되지 않자 재미가 붙어서 일부러 염소를 미군부대에 들여보내 놓고 찾으러 가는 척 하면서 이 같은 도둑질을 계속해서 한 것이다. 이를 빌어 계획적으로 다른 일을 빙자해서 무엇을 훔쳐내는 짓을 '얌생이 몬다.'라고 한다. 얌생이는 염소의 경상도 사투리다. 그래서 '염소 몬다.'라고 하지 않고 '얌생이 몬다.'라고 한 것 같다. 피난 시절의 어려움을 알 수 있는 조어다.

 

따라서 40계단 일대 구호물자 장터는 국제시장이 들어서기 이전의 도떼기시장과 마찬가지로 이름난 도떼기시장이 되기도 했었다. 도떼기시장은 정상적인 시장이 아닌 일정한 곳에서, 재고품, 중고품, 고물 따위 온갖 상품의 도산매, 방매, 비밀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끌벅적한 시장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분주하며 시끄러운 곳'을 의미하는데 부산 최대 규모의 재래시장인 국제시장의 전 이름이 바로 도떼기시장이다. 이처럼 당시 40계단의 구호물자 장터는 이 국제시장의 규모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사라졌던 곳이었다.

 


가족 상봉의 장, 영도다리와 40계단


경상도 아가씨의 가사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세요.'에 나오는 것처럼 당시만 하더라도 40계단에서 영도다리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피난민들은 더러 40계단에 기대고 앉아 낮에는 영도다리를 바라보며 피난살이의 고달픔을 달랬다. 그리고 밤에는 부산항에 정박해 있는 숱한 배들이 밝히고 있는 휘황찬란한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향수를 달랬다.


전쟁으로 모든 주위환경이 피폐했던 부산에서 볼 것이라곤 이 두 가지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쟁을 피해서 부산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은 더러 가족들에게 '헤어지더라도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아마 가족들의 약속 때문에 40계단에 앉아 부산항과 영도다리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40계단은 영도다리와 더불어 피난으로 인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는 상봉의 장이었다.

 



▲ 당시 부산항에 벌어진 장터 광경

 


꿀꿀이죽과 부대찌개


또한 우리가 즐겨먹는 먹을거리에도 6. 25 전쟁의 아픔이 남아있다. 6. 25 전쟁과 더불어 생겨난 먹을거리 가운데 우리의 가슴팍을 허비던 '꿀꿀이죽'이 있었다. 평생을 지내오던 고향집을 등지고 너나없이 지친 몸을 이끌어 몰려든 피란지에선 입에 풀칠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하던 그때, 미군 부대에서 내다 버린 음식 찌꺼기를 모아 끓여 팔던 음식을 '꿀꿀이죽'이라고 했다



 

▲ 꿀꿀이죽을 먹는 장면



앞서 말했던 '얌생이 몬다.'는 말과 함께 슬픈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이름이다. 하지만 이 꿀꿀이죽과 함께 선보인 부대찌개는 아직도 살아남아서 이 음식 역사를 아는 이들이게 그때의 아픔을 새롭게 해 준다. 부대찌개란 미군 부대에서 막일하던 사람들이 미국 군인들의 눈을 속이고 조금씩 가무려 내와 저자에 내다팔던 소시지 햄 돼지고기 쇠고기 따위를 미군부대에서 나왔다하여 '부대고기'라 하고 이 부대고기로 만든 음식을 부대찌개라 했다.


그래서 부대찌개는 미군 부대 가까운 음식점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값싸고 맛있는 안주로 알려지면서 부대고기와 줄이 닿지 않는 곳으로도 널리 퍼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고 미군들이 먹다 버린 음식들을 끓여 먹을 수 밖에 없었던 피난 생활의 어려움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우리가 즐겨 먹는 이 부대찌개가 6. 25 전쟁의 아픔을 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다음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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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04 09:34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BlogIcon 모르세 2014.02.04 20:13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 2017.05.13 06:46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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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관심이 부족한 지역민들


많은 사람들이 지방(혹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서울 및 수도권 중심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운영이 서울 및 수도권 중심주의를 유발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에 관심을 꺼야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지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부터 그 관심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전공했고, 또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부산 곳곳에 숨어 있는 부산의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많은 시간을 이 작업에 할애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를 여행하고 그곳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고자 한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부산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내고, 풀어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작업의 첫 장소는 부산 중구 중앙동에 소재한 40계단이다.


부산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 내리면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가 바로 보인다. 이 거리는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을 거쳐 40계단문화관과 팔성관광까지 약 450m가량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한국 전쟁 시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유서깊은 40계단 주변을 50~60년대 분위기에 맞도록 재현하여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40계단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를 네 번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교두보 40계단, 두 번째 이야기





▲ 현재 40계단의 모습



현재 40계단에 가보면 중앙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동상 가까이에 가보면 <경상도 아가씨>라는 노래 가사와 함께 누르면 노래가 나오는 버튼이 보인다. 왜 40계단에 <경상도 아가씨>라는 노래가 있어야만 했을까. 40계단과 <경상도 아가씨>는 깊은 연관이 있다.


40계단과 경상도 아가씨의 관계

 

1953년 부산에서의 피난살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작사가 손로원과 작곡가 이재호 그리고 김교성, 엄토미, 박재홍 등이 모여 조촐한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술에 약한 사람은 술 반병에 벌써 쓰러져있었고, 해도 저물기 시작했다. 그 때 손로원이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김교성의 노련한 젓가락 장단에 맞춰 나그네 설움을 부르고 있던 동료들은 나가는 손로원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손로원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가 싶어 엄토미가 밖으로 나가봤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계단 수를 세고 있는 손로원이었다. 워낙에 긴 계단인 데에다가 또 술이 거나하게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기 때문에 계단 하나 세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형님, 그만 들어오소. 계단 수를 세어서 어데다가 써 먹을라고 그러쇼?

 

이에 손로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 이제 거의 셋다. 먼저 들어가 있어라.

 

손로원이 센 계단의 숫자는 40여개 남짓이었다. 40여개의 계단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동료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에 손로원은 종이쪽에 가사 한 편을 적었다.

 

-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있는 나그네..

 

- 손씨행님 사십 계단이 뭡니꺼? 이재호가 물었다.

 

- . 내가 나가서 계단 수를 세어보니까 40개가 되더라구 그래서 사십 계단이지 뭐

 

손로원은 말을 흐리더니 결국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러자 동료 이재호는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가사를 빼앗아 들어 읽어내려갔다. 이재호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불이 튀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밤 이재호는 잠도 자지 않고 미친듯이 악보를 써내려갔다. 이재호는 기어이 노래 한 곡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경상도 아가씨'라는 곡이다. 이 노래는 우선은 같은 술자리에 있었던 박재홍이 극장무대에서 많이 불렀고 휴전 이후 '미도파레코드'에서 박재홍이 정식적으로 음반을 취입하였다.

 



▲ 가수 박재홍과 당시 경상도 아가씨 앨범


 

이 경상도 아가씨라는 대중가요는 1953년 발표되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잠잠히 보고 있으면 6. 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애환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북 고향을 생각하는 청년의 마음을 달래주는 경상도 아가씨가 있기를 소원하며 손로원 작사가가 가사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의가 아닌 타의로 정든 고향을 떠나 먼 타지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 노래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어느 누가 피난살이의 어려움을 알 수 있었으며, 고향을 그리는 그 마음을 알 수 있었을까.

 


<경상도 아가씨> -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러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이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고향 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장사 하드래도 살아 보세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든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뼈에 맺힌 내 고장이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세요.

복사꽃이 피든 날 밤 옷소매를 끌어 잡는

경상도 아가씨가 안타까워 우는구나.

그래도 잊지 못할 내 고장이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다음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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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4.01.30 14:53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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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관심이 부족한 지역민들


많은 사람들이 지방(혹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서울 및 수도권 중심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운영이 서울 및 수도권 중심주의를 유발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에 관심을 꺼야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지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부터 그 관심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전공했고, 또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부산 곳곳에 숨어 있는 부산의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많은 시간을 이 작업에 할애할 수는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를 여행하고 그곳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고자 한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부산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찾아내고, 풀어낼 수 있었으면 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작업의 첫 장소는 부산 중구 중앙동에 소재한 40계단이다.


부산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 내리면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가 바로 보인다. 이 거리는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을 거쳐 40계단문화관과 팔성관광까지 약 450m가량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한국 전쟁 시 피난민의 애환과 향수가 담겨있는 유서깊은 40계단 주변을 50~60년대 분위기에 맞도록 재현하여 추억을 회상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40계단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를 네 번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교두보 40계단, 첫 번째 이야기

 


계단이란 무엇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계단들. 그 대부분은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통로로서 사용될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계단은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위아래를 이어주는 것, 서로 다른 위치를 하나로 묶는 계단의 속성은 그 하나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주위의 수많은 계단들에게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다. 나 또한 그렇다.

 



▲ 현재 40계단의 모습

 


하지만 어떤 한 계단에 올라보고, 그 계단에 대해서 이리저리 조사하면서 나는 내가 오른 이 계단과 더불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계단들에게 역사가 있고, 그곳을 딛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 이런 깨달음을 준 계단, 내가 올랐던 그 계단은 바로 40계단이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면 '그냥 계단이네?'하고 지나치거나 올라가버릴 수 있는 그런 계단이 보인다. 바로 100여년에 가까운 시간과 부산의 역사를 담아온 40계단이다. 철거될 위험 속에서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계단, 문득 40계단이 정말 외롭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40계단의 과거

 

40계단이 보이는 중앙역 주변 대부분의 땅들은 원래 바다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때(강화도조약은 조선과 일본이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다. 조선은 군사력을 동원해 조약을 강압하는 일본에 못이겨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일본전관거류지로 사용하기 위해 용두산 주위 10만여 평에 달하는 곳을 연간 50엔에 조선으로부터 대여했다그때 화폐가치가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연간 50엔이라니, 지금으로 치면 연간 500원에 10만여 평을 빌렸다는 소리다. 참 완전 날강도나 다름 없다. 


일본은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그 부근을 근거지로 삼아 조선을 집어 삼키기 위한 준비를 한다. 초량왜관 일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일본은 땅을 넓히기 위해, 그리고 더 완벽한 항구 확보를 위해 일환으로 매축사업(간을 시작한다. 지금의 중구 중앙동 근처의 땅들은 일본의 이 매축사업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 20세기 초 부산항의 모습



1900년대 초반부터 30여 년간 이어지는 매축공사는 북빈매축공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공사는 부산 매축주식회사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41,374평에 달하는 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매축공사는 경부선의 종점을 부산역까지 확대할 수 있는 땅의 확보를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은 이어 부산 잔교(잔교란 배가 잘 정박할 수 있도록 하는 접안시설이다)를 건설해서 관부연락선과 외항선들이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했다. 이 두 가지 공사는 부산항에서 하역한 물품을 부산역을 통해 바로 이송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로 인해 부산은 본격적인 병참기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일본의 욕심은 끝이 없었는지 계속해서 바다를 메우기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쌍산착평공사라고 불리는 매축사업을 실시한다. 일본전관거류지, 즉 용두산 공원에서 부산진으로 가려면 영선산이라 불린 쌍산의 고갯길을 넘어야했다. 이 영선고갯길은 지금의 초량지역과 대청로를 잇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이곳을 넘지 않으면 부산진으로 갈 수 없었다.


이 길은 약 1.14Km 거리의 작은 고갯길로 조선 후기 이후 개항 때까지 한, 일간 무역과 외교의 주요 통로였고, 200년간 이 고갯길은 동래상인들과 일본 상인들이 초량왜관에서의 무역을 위해 다니던 교역로였다. 그리고 이 고개는 소나무가 울창한데다 초량왜관과 관련하여 물의를 일으킨 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터가 있었기 때문에 대낮에도 혼자서 이 고갯길을 드나들면 으스스했다. 그래서 여러 명이 뭉쳐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 당시 부산역의 모습



일본은 부산포를 두 개로 가르고, 원활한 통행을 가로막는 이 쌍산을 교통의 편의를 위해 깎아서 편평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생긴 매축지 일대를 새마당이라고 했다. 40계단은 이 쌍산착평공사로 생긴 언덕 절개지에 만들어져 새마당과 이전은 해안가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40계단은 19506. 25 전쟁이 터지자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유명해졌다. 40계단은 그 모든 애환을 담아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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