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레전트 빌> 네이버 영화 제공



 <플레전트 빌>은 데이빗과 제니퍼라는 두 주인공이 영화 속 동명의 마을에서 벌이는 사건을 다룬 영화다. 영화 속 마을인 '플레전트 빌'은 그 이름과 같이 유쾌함만 존재하는 곳이다. 마을사람들은 항상 유쾌하며 변함없다. 또한 유쾌함을 방해하는 모든 일들이 추상적으로만 존재할 뿐 마을 안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플레전트 빌에 들어온 데이빗과 제니퍼는 한 치의 변함도 용납하지 않는 마을에 변화의 불씨를 당긴다. 그런데 정말 이 변화는 옳은 것일까.

 

 데이빗과 제니퍼는 플레전트 빌의 입장에서 보면 청하지 않은 손님이다. 그들은 플레전트 빌이 유지하고 있는 룰에서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플레전트 빌을 동경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 룰을 존중하고 지키려 애쓴다. 하지만 제니퍼는 마을의 룰을 존중하기 보다는 본래 자신에게 내재돼 있던 룰을 마을에 관철하려고 한다. 단순히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런 제니퍼의 행위는 마을의 룰을 한 사람의 잣대로 파괴하는 폭력적인 행위다. 마을사람들의 누구도 마을의 완전성을 훼손해 달라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데이빗도 제니퍼와 마찬가지로 마을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시작한다.

 



영화 <플레전트 빌>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제공



 영화 <플레전트 빌>에서 데이빗과 제니퍼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마을의 구원자로 보여질 수 있다. 관객도 그들과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에서 보기에는 그들은 구원자라기보다는 바이러스에 가깝다. 왜냐하면 본래 그들이 살았던 곳와 플레전트 빌이란 곳은 '다른' 세계일 뿐이지 결코 플레전트 빌이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빗과 제니퍼는 이런 다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세계의 룰과 세계관이 더 낫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해 버리고 마을사람들을 계몽하고자 한다. 이런 계몽주의적 발상은 얼핏 보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계몽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데이빗과 제니퍼는 컴퓨터바이러스 하나가 컴퓨터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점점 플레전트 빌 본래의 룰과 세계관을 깨뜨려 나간다. 과연 플레전트 빌의 사람들은 유쾌하지 못함이라는 감정과 상황을 원했을까.

 

데이빗과 제니퍼의 행위와 관련된 적절한 예가 있다. 최근 많은 대학교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각종 종교의 전도행위가 문제시 되고 있다. 종교인들이 전도행위를 하는 것은 자신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도 이 좋은 것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과 다른 이들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의 전도행위를 싫어한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논리적인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를 전하기 때문이다. 이는 데이빗과 제니퍼가 플레전트 빌에 행한 행동과 비슷한 맥락이다. 제니퍼가 스킵 마틴에게 마을의 룰을 넘는 성적 행위를 강요하고, 데이빗이 햄버거 가게 주인인 빌에게 모든 것을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자신에게 좋다고 해서 상대방 역시 좋을 것이라고 예단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영화 <플레전트 빌>의 한 장면 네이버 영화 제공



플레전트 빌의 사람들은 안정을 상징하고 데이빗과 제니퍼는 변화를 상징한다. 데이빗과 제니퍼가 가져온 변화는 마을 전체에 퍼졌고, 마을은 그들이 왔던 세상과 동일하게 변했다. 그런데 인생에서 변화는 추구해야할 좋은 가치이고, 안정은 배격해야할 나쁜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만 봐도 사람들은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 대학생들은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이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의사, 변호사 등의 직업을 얻으려 기를 쓴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들까지도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자신들의 삶을 소비하면서 공부하고 또 공부한다. 이런 세태들 때문에 변화를 독려하고 안정보다는 변화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 변화로만 가득하다면 반대로 안정이라는 담론이 머리를 들 것이다. 이처럼 변화와 안정은 우열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삶을 B D사이의 C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탄생(Birth)와 죽음(Death)사이의 선택(Choice)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선택은 주체에게 아주 중요한 권리이다. 변화와 안정. 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타자에 의해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라는 주체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데이빗과 제니퍼는 그 존재자체로 변화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굳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관철하려 들지 않아도 이미 균열은 일어났다. 그 균열을 포착하는 것은 마을사람들 자신이어야 한다.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변화는 옳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각성하고 주체적인 판단을 통해 변화와 안정을 선택했을 때만이 진정한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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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4.01.19 12:48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그러네요...누구 구누를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이는것...그것이 핵심이지요..
    어떤이에게는 폭력일수있다는말...정말 공감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 BlogIcon 서흔(書痕) 2014.01.20 10:47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누군가가 그것이 옳다고 해서 나에게 그것을 관철시키는 것은 참 기분나쁜 일이죠. 배려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ㅎㅎ

  2. BlogIcon hyo 2014.11.13 15:17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마지막 사르트르의 사례를 든것처럼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은 본인 자신이 해야합니다 하지만 플레전트빌 사람들은 기존의 룰을 선택한것이 아니라 강요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말해 플레전트 빌 밖에 무엇이있는지 책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도 모른체 말이죠 제 생각엔 데이비드와 제니퍼가 그들을 변화하도록 강요하기보단 플레전트 빌 사람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준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선택은 본인 자신의 몫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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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다 쓰고 난 나머지를 뜻하는 단어다. 본래 잉여란 잉여 생산물, 잉여 가치 등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 잉여는 정말로 다 쓰고 난 나머지, 정확히 말하면 다 채우고 남은 찌꺼기를 뜻하는 단어가 됐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찌질이. 그것이 바로 잉여다.

 

이런 잉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있다. 바로 엄태화 감독의 잉투기. 잉투기는 실제 디씨인사이드 격투 갤러리(이하 격갤)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영화는 주인공 태식(칡콩팥)이 온라인 게임(리니지2) 아이템을 팔러 나갔다가 격갤에서 사사건건 대립하던 젖존슨에게 속아 급습을 당하면서 시작된다.

 

잉여를 조롱하는 세상

 

태식이 젖존슨에게 폭행을 당하는 장면은 동영상으로 찍혀 전국으로 퍼져나간다. 당시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있던 태식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고 있을 뿐이었다. 스마트폰 뒤에 숨은 사람들의 시선은 태식을 향한 조롱을 담고 있었다. 잉여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엄태화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이런 조롱어린 다수의 시선들을 등장시킨다.

 

전 국민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태식은 안면 타격 공포증을 얻어 안면으로 날아오는 모든 것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보지 않는데도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두려움까지 갖는다. 그 비참함을 견디기 위해 태식은 부엌칼을 지니고 다닌다. 그리고 복수를 다짐하며 젖존슨을 찾기 시작한다. 젖존슨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 건 영자라는 소녀였다. 영자는 바츠해방전쟁을 언급하며 젖존슨이 그 해방전쟁을 이끈 군주라고 말한다.

 




바츠해방전쟁은 리니지2의 최대 서버인 바츠에서 약 4년 간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바츠 서버를 장악한 DK혈맹과 군주 아키러스의 폭정에 대항해 바츠 서버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리니지2 전 서버의 유저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태식도 리니지2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 전쟁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DK 연합전선의 군주라는 것은 젖존슨이 태식의 삶을 망가뜨린 악마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태식은 이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치부한다.

 

이후 태식은 젖존슨을 좋아한 여자를 만나고, 리니지2 아이템을 산다고 속였던 젖존슨의 친한 동생도 만나지만 거기서 얻은 것은 젖존슨이 악마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잉여라는 사실 뿐이었다. 그 사실에 분노한 태식은 얼떨결에 부엌칼을 휘둘러 희준을 다치게 하고, 태식의 엄마는 코스타리카로 이민을 가자고 말한다. 자신을 옥죄는 환경 속에서 태식은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태식은 가지고 다니던 부엌칼을 내려놓고 정정당당하게 젖존슨과 맞붙기로 결심한다. 잉투기 대회 당일, 태식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젖존슨의 자살 소식이었다. 젖존슨을 이겨야 한다는 목표는 태식의 전부였었다. 태식은 망연자실 한다. 자신이 당한 수치를 쏟아내야 할 대상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세상이 보내는 시선을 직면하기

 

태식은 자신을 절망에 빠뜨린 젖존슨의 죽음에 삶의 이유가 없어진 듯한 충격을 받는다. 그래서 그는 영자에게 자신을 건져 달라 말하지만 영자는 그럴 마음이 없다. 이제 태식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던 장소인 간석오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다.

 

왜 태식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에게 주먹을 휘두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것은 젖존슨에게 두드려 맞는 자신을 조롱했던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태식은 남녀 구분 없이 폭행을 가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안면타격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묻지마 폭행을 가하면서도 안면으로 날아오는 것들에 두려움을 느낀다.

 

태식은 결국 다수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게 된다. 하지만 수없이 얼굴을 가격당하면서도 태식은 얼굴을 돌리지 않는다. 갑자기 태식이 그런 마음을 먹게 된 이유가 뭘까. 정말 단순히 영자의 말이 생각나서 일까. 아마도 태식은 세상이 보내는 시선에 직면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태식은 안면타격 공포증을 이겨낸다. 그리고 항복의 백기가 아닌 승리의 흑기를 하늘에 던진다.

 




영화 잉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관심병 환자다. 영자는 부모의 부재와 친구들의 따돌림에서 오는 무관심을 견디기 위해 인터넷방송에서 먹방을 한다. 그리고 도어락이 자꾸 고장나는 영자의 집은 영자가 고립되기 싫어한다는 것, 즉 관심 받고 싶음을 대변한다. 태식도 엄마에게 같은 집에 산다고 함께 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관심의 부재 속에서 살았다. 다른 인물들도 영자나 태식과 같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영자는 자신에게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같은 반 친구들에게 밀가루 테러를 감행한다. 태식도 끝내 안면타격 공포증을 이겨낸다. 희준도 잉투기 시합에서 쓰러지지 않고 끝내 버텨낸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뒤에 숨어 잉여들에게 보내는 조롱의 시선은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걷어내고 직접 대면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다. 잉여들이여, 두려워 말라. 그리고 환상을 걷어내고 세상을 직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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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singenv 2013.12.19 11:06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이 영화, 요즘 잘 나가던데 말이죠~
    그래도 독립영화의 한계는 분명한 듯ㅠ
    저도 보고 리뷰 남길 수 있으면 남기고 싶네요~

    • BlogIcon 서흔(書痕) 2013.12.19 13:23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그래도 지금 20대의 정서가 잘 녹아있는 작품 같아요.
      보면서 이런 영화 만들기 쉽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었죠 ㅋㅋ

  2. 궁금?? 2014.01.05 15:01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근데 엄마 코스타리카 간거에요? 긴가민가하넹

  3. BlogIcon 격갤출신 2014.08.29 20:18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저거 인물이랑 잉투기 시합만 모티브 따온거지 완전 과장으로 스토리 자작한거 둘이 안싸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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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봤다. <설국 열차>라는 영화였다. 유난히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을 꺼리지만, <설국 열차>는 그런 꺼림을 상쇄시켜주는 어떤 아우라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2주가 지난 뒤지만, 아직도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인상 깊은 영화였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이후로 이렇게 꼼꼼히 영화의 장면을 주시하고, 어떤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시각과 청각을 곤두세운 것도 오랜만이다. 


필자에게는 즐거움을 줬던 영화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남긴 평을 보면 호불호가 상당히 갈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는 필자처럼 영화의 장면 장면마다 놓인 의미들을 찾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평을 남기고, 또 다른 이는 영화가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 관객들을 부담스럽게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평이 갈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봉준호 감독이 <설국 열차>란 영화와 관객과의 미적 거리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 개연성의 부족,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다.



<설국 열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의 장면을 이어주는 개연성이 부족함을 많이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영화의 배경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CW(Control Weather)-7라는 것을 쏘아올렸지만 이로 인해 발생한 급작스런 빙하기로 인류 대부분이 죽는다. 보통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인류의 존속을 위해 서로 연대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윌포드 열차에서 그런 것 따위는 없다. 처음 열차에 올랐던 칸의 등급대로 계급이 정해져 버린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개연성을 획득하게 되지만, 꼬리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의문의 빨간 종이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열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안 설계자의 위치를 알려주다니. 윌포드의 총리 메이슨이 말하는 균형의 유지와는 많이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에도 남궁민수가 영화의 후반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냥을 꼬리칸의 아이가 그냥 가져가게 둔다거나, 아이들을 교육하는 임신한 교사가 갑자기 총을 쏜다거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살아나거나, 영원한 엔진의 수호자 윌포드가 너무 쉽게 열차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의 장면은 관객들이 영화를 이어나가는데 장애를 준다. 





이렇게 개연성을 획득하지 못한 장면들이 많아지면 관객들은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부드럽고 매끈한 서사를 기대한 관객들이 중간에 단절된 영화의 장면들을 보면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혼란을 느끼지 못하는 관객들도 있다. 바로 영화의 끊어진 장면을 이어나갈 수 있는 스키마(배경 지식)를 가진 이들이다. 평소에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이거나, 문학을 좋아하거나 문학이론을 공부한 사람 등은 자기가 가진 나름의 지식으로 그 빈 공간을 메워나거나 영화의 끊어진 장면들을 이어붙인다. <설국 열차>의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너무 불친절하게 만들어 놓았다. 



- 아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설국 열차>





영화를 많이 본 이들은 <설국 열차>에서 바로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 시리즈를 떠올린다. 머리칸에서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말하는 대사가 바로 그 키워드다. "열차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란과 같은 혼란도 필요하다." 이 윌포드의 대사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의 창조자 아키텍트가 주인공 네오에게 하는 대사와 일치한다. "인간이 내포하고 있는 변수에 매트릭스가 적응하기 위해서는 네오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소설을 많이 읽은 이라면 <설국 열차>를 보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이란 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커티스가 타냐의 아이를 구하면서 엔진의 톱니에 한쪽 팔이 잘리는 장면을 보면서 꼬리칸의 지도자 길리엄의 모습이 겹쳐보일 것이다. 이는 커티스가 윌포드의 감언이설에서 벗어나 꼬리칸이 하려고 했던 혁명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성경을 아는 이들이라면 남궁민수의 딸 요나를 보면서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 요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요나는 신약의 예수를 상징하는 인물로, 윌포드 열차의 잔인한 계급 사회를 깨고 인류를 구원하는 자로 볼 수 있다. 타냐의 아들 티미는 흑인으로 흑인은 인류의 시초를 상징하고 요나는 그 인류의 구원자로서, 또 인류를 번성시킬 자로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설국 열차>에 숨겨진 수많은 의미들을 캐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해석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배경 지식들이 필요하다. 우선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를 모두 봐야하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도 읽어야할 뿐더러, 성경에 대한 지식과 인류 시초에 대한 지식, 상징이라는 문학이론까지 알아야할 것들이 너무 많다. 이런 것들은 소수의 마니아들이나 관련 전공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접하기 힘든 것들이다. 당연히 다수의 관객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 그래도 <설국 열차>는 <설국 열차>다



아무리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라고 하더라도 <설국 열차>는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중들이 <설국 열차>에 녹아 있는 기호들을 해석하지 못한다고 해도, 영화 전체에 깔려 있는 메세지는 명확하다. 윌포드가 영원한 엔진을 만들었다고 자부하지만 꼬리칸의 아이들을 부품으로 써야만 하는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에게 사회시스템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느끼게 했다. 혁명은 단순히 꼬리에서 머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고 있는 시스템 자체를 파괴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커티스가 윌포드와 같이 변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한 세계의 파괴가 인류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가 스스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믿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 열차>의 관객수가 850만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하지만 대작의 척도인 1000만 관객에 이를지는 아직 미지수다. 개봉한지도 벌써 3주나 지난데다가  마지막 뒷심을 발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쨋든 많은 관객이 찾는다는 것은 모든 영화에 좋은 일이기 때문에 <설국 열차>의 1000만 관객 동원을 기원한다.



PS. 인터넷 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양갱을 사가라고 했었는데, 영화를 볼 때 양갱을 미처 사가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사소하지만 색다른 경험이었을텐데 말이다. 어디서 봤는데, 바퀴벌레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를 완벽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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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sky@maker.so 2013.08.24 09:13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롱런은 힘든 영화에요. 보통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 수 있는 영화는 아닌듯하거든요.

    하지만 잘 만든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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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본래 드리마는 즐겨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에는 그렇게 눈이 가지 않는다. 데이트를 하거나 약속이 있을 때, 영화관을 가는 것 외에는 딱히 찾아서 영화를 보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평론과 관련된 전공을 가지고 있다보니, 관심이 자연스레 영화에까지 뻗친 것 같다. 


최근 개봉돼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를 봤다. 바로 <더 테러 라이브>란 영화다. 오래간만에 친구와 얼굴도 볼겸 해운대 스폰지에 있는 메가박스 영화관을 찾았다. 요즘 <더 테러 라이브>와 <설국열차>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터라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이후 <설국열차> 관한 리뷰도 쓸 예정이다. 그럼 서두는 이정도로 줄이고 <더 테러 라이브>의 리뷰를 시작하겠다. 영화 전반의 내용을 다룰 것이라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주의하길 바란다.





 

 재기를 위해 테러를 동아줄로 잡은 한 언론인



영화는 윤영화(하정우 역)가 진행하는 한 라디오 프로에 마포대교를 터트릴 것이라는 전화가 오면서 시작된다. 윤영화는 어느 허풍선이가 떠드는 허풍으로 취급하고 무시하지만, 실제로 마포대교가 폭파되면서 윤영화는 한 가지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언론인들이라면 꿈꾸는 '특종'이라는 단어 말이다. 





윤영화는 신고하려는 PD를 제지하고,  보도국장인 차대은(이경영 역)과 딜을 한다. 마포대교를 폭파했다고 주장하는 테러범이 자신에게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윤영화는 특종을 통해 재기의 꿈을 꾼다. 딜을 받아들였던 차대은 역시 시청률을 통해 자신의 야욕을 챙기려고 한다. 여기서 마포대교가 폭파됐고,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은 사라진다. 남은 것은 인간들의 야욕과 시청률 밖에 없다.


영화 초반의 장면들만 보면 자극적인 것만을 찾는 현 언론들의 실상을 풍자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현 언론들이 어떤 사건의 본질보다는 사변적이라도 자극적인 부분에 천착하거나, 아니면 시청률이나 조회수를 높이기 위한 자극적인 제목, 음란한 내용 등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이후 윤영화에게 전화한 테러범은 21억이 넘는 돈과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윤영화와 방송국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테러범에게 여러 질문들을 하기 시작한다.



 

 대통령의 사과를 받기 위해 테러를 일으킨 한 인간



영화의 중반부에 들어서면 테러범이 테러를 일으킨 이유가 나온다. '마포대교 보수공사의 인부로 일했던 적이 있었는데, 철야 공사 도중 인부의 동료가 마포대교에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적절한 조치와 보상은 없었고, 그 사건은 잊혀지고 말았다.' 테러범은 그 사건에 대한 보상과 사과를 받기 위해 이 테러를 일으켰다고 말한다. 법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면서.





이 장면을 떠올리면서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다. 살인을 살인으로 징치하면 같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법적인, 윤리적인 보상을 받기 어려워진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는 법이 공정하게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식으로 그려졌지만, 과연 현실에서 법이 모두를 지켜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분명히 법적인 바운더리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록 테러범의 행동에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해는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테러범은 끊임없이 인질을 담보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한다. 전 국민의 80%에 가까운 숫자가 이 테러를 지켜보고 있다. 테러범은 대통령의 사과를 받기 위해 테러라는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했지만, 대통령이 사과를 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는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대통령이 직접 사과를 할 것이란 기대가 사라지고, 다리가 무너지며 인질들이 죽으면서 테러범은 준비했던 특단의 조치를 시행한다.



 

권력에게 버림 받은 하정우와 인질들



본래 윤영화는 시청률을 올리고, 마감뉴스를 맡았던 이전의 위치로 돌아가려는 것에서 끝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변수 때문에 실패한다. 바로 폭탄의 존재다. 아나운서의 마이크가 터지는데서 폭탄의 두려움은 시작된다. 이 때문에 윤영화는 점점 테러범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윤영화는 테러범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사과를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오지 않고 대신 경찰청장이 스튜디오에 도착한다. 거기에서도 사과는 없고, 테러범에게 체포하고 말 것이라는 윽박지름만 존재한다. 테러범은 아들의 사진을 공개하려는 경찰청장을 결국 죽이고 만다. 옆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한 윤영화는 극도의 공포에 빠지게 되고, 이는 더욱 테러범을 옹호하게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죽었음에도 테러범은 대통령의 사과를 계속 요구한다.


보도국장 차대은은 "테러와의 협상은 없다. 대통령의 사과도 없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다."는 청와대의 말을 전하라고 윤영화에게 말한다. 하지만 폭탄의 존재는 윤영화를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만든다. 결국 윤영화는 차대은이 말한 바를 이행할 수 없다. 이후 차대은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인질이 죽어야 테러가 끝난다. 지금 이 테러상황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보고 있다. 그리고 테러범의 수단은 잘못됐을지 몰라도 명분은 충분히 있다. 억울하게 죽은 동료의 복수를 하는 것. 그래서 국민들은 아마 테러범을 옹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사과라는 것은 묘한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인질들이 죽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TV를 통해서 본다고 해도 큰 충격을 준다. 거기에서 테러범의 명분은 사라진다. 복수와 상관없는 제3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권력은 이것을 노리고 있다. 아무런 대책없는 공허한 말을 내뱉으며 시간을 끄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인질들의 목숨은 상관이 없다. 권력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바로 테러범이 죽인 것이기 때문이다. TV를 통해 이 사건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이런 트릭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결국 권력들의 잘못은 은폐되고, 권력들의 치부를 폭로하려 했던 테러범은 희생양이 되어 권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어버린다.



 

 테러범의 처지에 공감해버린 윤영화



윤영화는 폭탄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수단 때문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지만, 권력들은 그런 윤영화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차대은은 윤영화의 비리를 다른 언론사에 제공하고, 청와대는 윤영화를 희생양으로 삼아 이 사태를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다시말하면 윤영화는 토사구팽된 것이다. 이에 더해 자신의 전 아내인 이지수(김소진 역) 기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테러범에게 분노한다.





테러범은 SNC방송국의 옆 건물을 폭파시키고, SNC방송국 조차 폭파시키려고 한다. 그 전에 윤영화를 만나기 위해 윤영화가 있던 곳으로 들어온다. 그것을 본 윤영화는 테러범과 격투를 벌이고, 테러범은 부서진 창문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테러범은 떨어지지 않았고, 윤영화는 그런 상태에서 테러범과 대화를 나눈다. 테러범은 자신이 행세했던 사람의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윤영화의 방송만 수십 년을 들었고, 윤영화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있었다는 말을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이후 윤영화는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과 토사구팽 당한 자신의 처지가 아버지를 잃은 분노에 쌓인 테러범에게 오버랩됐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변화는 테러범을 살리고자하는 마음을 먹게 하지만, 결국 테러범은 사살당한다. 동시에 자신을 사살하라는 지시가 무전기를 통해 들린다. 결국 자신에게 남은 폭탄의 스위치를 누른다.


SNC방송국이 넘어가는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윤영화의 옆 창문을 통해서 국회의사당의 모습이 보인다.





 

 현 세태와 닮은 <더 테러 라이브>, 국민주권은 과연 존재하나?



<더 테러 라이브>라는 영화는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언론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영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국민을 국민으로 보지 않는 권력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은 국민이 뽑는 것이지만, 뽑히고 난 대통령은 국민을 국민으로 보지 않는다. 몇 만의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을 규탄해도 언급 하나 없다. 증세 없이 복지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증세는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영화에서는 마포대교를 폭파시킨다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다. 이것이 과연 영화에서만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 대통령은 이 영화와 똑같은 대처를 했을 것이다. 결국 인질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을 것이고, 테러범의 명분도 테러라는 것으로 추상화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권력의 추악한 본질은 사라지고, 테러의 위협에서 안전을 지킨다는 이유로 더욱 국민을 옥죄어 올 것이다. 테러의 위협을 북한의 위협으로 치환한다면 우리나라와 똑 닮아 보이지 않는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명시돼있다. 하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헌법은 선거가 있을 때나 적용될 수 있다. <더 테러 라이브>가 비록 영화에 불과할지는 모르나,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이 이런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국민주권이 허상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촛불처럼.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영화에도 게재됐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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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sky@maker.so 2013.08.23 22:19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영화는 70%정도는 하정우 때문에 본다던데요. ㅎㅎ

  2. 2015.02.20 00:55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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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1일. 시일이 맞아 개봉된 날에 영화를 보러 갔다. <<7번방의 기적>>을 본 이후 2013년의 두 번째 영화다. 아마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원작으로 한 영화일 것이다. 딱히 소설을 즐겨 읽지는 않는 편이라 톨스토이의 저작 역시 하나도 읽어본 적이 없다. 집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두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봤다. 


  영화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주인공인 안나 카레니나가 자살하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랑의 끝이 죽음이라니, 당연히 비극적이라고 할 만하다. 카레니나는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사회적 통념, 주변의 시선 때문에 스스로 사랑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유부녀와 한 청년의 사랑.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이런 사랑은 용납할 수 없었나 보다. 사회는 결국 한 여자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회가 용납하는 사랑은 한정적이다.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예전에는 연상연하 커플도 용납받지 못한 때가 있었다. 남자의 나이가 많은 것은 괜찮지만 여자의 나이가 많은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것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쉽게 드러낼 수 없다. 사회가 그것을 터부시하기 때문이다. 유부남과 처녀, 총각과 유부녀의 사랑. 이것은 불륜으로 매도돼 처벌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되고 있다.


  사랑과 사회란 공존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적 죽음처럼, 지금도 이런 비극적 사랑을 하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결코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지탄을 감내하기에는 인간이 너무나도 나약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둘만의 경험"이라고 말했던 알랭 바디우의 예찬처럼, 어떤 조건이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둘만의 경험을 하고 있다면 사랑으로 인정되는 그런 세상은 올 수 있을까.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은 그것이 쉽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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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예문당 2013.12.10 15:25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저도 이 영화를 봤었어요. 책으로까지 만나보지는 못했지만요.
    블로그에 처음 방문했어요. 느낌 참 좋은데요? 앞으로도 종종 만나뵐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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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바야흐로 2011년 5월 7일이었다. 6일에 원주로 올라와 만반의 준비를 하고 7일에 강릉을 향해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제천, 영월, 태백, 도계, 동해역에 들렸다가 10시가 다 되어서 강릉에 도착했다. 아침 7시에 출발해서 저녁 10시에 도착한 15시간의 대장정이었다. 강릉에 도착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잘 곳도 마땅찮았다. 그래서 역 주변을 배회하다가 24시간 운영하는 맥도날드 매장이 보여 야식이라도 먹을 겸해서 들어갔다. 그곳에서 찜질방에 들어갈 돈을 아껴 심야영화를 보자고 결정하고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갔다. 
 강릉 홈플러스에 있는 프리머스에 도착해서 무슨 영화를 볼까 생각하다가 시간을 때우려면 가장 늦게 시작하는 영화를 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12시 35분에 시작하고 러닝타임도 2시간이 넘는 'Sunny'란 영화를 선택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나는 저렇게 아내를 고생시키지 않으리라'라는 마음을 먹었다. 남편과 딸의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정작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주인공이 큰 병에 걸린 친구를 만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Sunny라는 팀 이름을 가진 일곱 명의 친구들을 찾아가면서 여고시절 겪었던 에피소드를 말하는 그런 방식이었다.


 개인적으로 MBC드라마 '나쁜남자'에서 한가인의 동생으로 나온 심은경이 나와서 더 친숙한 영화였다. 나쁜남자를 워낙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그리고 그 드라마에서 괜찮게 생각했던 배우가 나왔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본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중반에 데모를 하는 장면에서 그것을 너무 희화화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남아있긴 했지만, 당시 시대를 살지 않았던, 아직 24살에 불과한 나에게도 중학교 때의 추억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한 영화였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선 과연 나는 저런 친구들을 가지고 있을까란 생각을 해봤다. 아픈 친구를 위해 친구들을 찾아내고, 그 아픈 친구는자신의 아픔을 돌보기도 모자란 시간에 다른 친구들의 아픔을 돌아보고 있었다.  '친구'란 단어를 듣거나 입에서 낼 때에 절로 흐뭇할 수 있을까. 그런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혼자 보는 영화의 맛은 꽤 괜찮았다. 그리고 혼자 떠난 여행에서 친구의 소중함과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을 느꼈던, 혼자 떠난 여행의 의미가 배가될 수 있도록 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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