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봤다. <설국 열차>라는 영화였다. 유난히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을 꺼리지만, <설국 열차>는 그런 꺼림을 상쇄시켜주는 어떤 아우라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2주가 지난 뒤지만, 아직도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인상 깊은 영화였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이후로 이렇게 꼼꼼히 영화의 장면을 주시하고, 어떤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시각과 청각을 곤두세운 것도 오랜만이다. 


필자에게는 즐거움을 줬던 영화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남긴 평을 보면 호불호가 상당히 갈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는 필자처럼 영화의 장면 장면마다 놓인 의미들을 찾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평을 남기고, 또 다른 이는 영화가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해 관객들을 부담스럽게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평이 갈리게 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봉준호 감독이 <설국 열차>란 영화와 관객과의 미적 거리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 개연성의 부족,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다.



<설국 열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의 장면을 이어주는 개연성이 부족함을 많이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영화의 배경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CW(Control Weather)-7라는 것을 쏘아올렸지만 이로 인해 발생한 급작스런 빙하기로 인류 대부분이 죽는다. 보통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인류의 존속을 위해 서로 연대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윌포드 열차에서 그런 것 따위는 없다. 처음 열차에 올랐던 칸의 등급대로 계급이 정해져 버린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개연성을 획득하게 되지만, 꼬리칸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의문의 빨간 종이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진다. 열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안 설계자의 위치를 알려주다니. 윌포드의 총리 메이슨이 말하는 균형의 유지와는 많이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에도 남궁민수가 영화의 후반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냥을 꼬리칸의 아이가 그냥 가져가게 둔다거나, 아이들을 교육하는 임신한 교사가 갑자기 총을 쏜다거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살아나거나, 영원한 엔진의 수호자 윌포드가 너무 쉽게 열차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의 장면은 관객들이 영화를 이어나가는데 장애를 준다. 





이렇게 개연성을 획득하지 못한 장면들이 많아지면 관객들은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부드럽고 매끈한 서사를 기대한 관객들이 중간에 단절된 영화의 장면들을 보면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혼란을 느끼지 못하는 관객들도 있다. 바로 영화의 끊어진 장면을 이어나갈 수 있는 스키마(배경 지식)를 가진 이들이다. 평소에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이거나, 문학을 좋아하거나 문학이론을 공부한 사람 등은 자기가 가진 나름의 지식으로 그 빈 공간을 메워나거나 영화의 끊어진 장면들을 이어붙인다. <설국 열차>의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너무 불친절하게 만들어 놓았다. 



- 아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설국 열차>





영화를 많이 본 이들은 <설국 열차>에서 바로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 시리즈를 떠올린다. 머리칸에서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말하는 대사가 바로 그 키워드다. "열차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란과 같은 혼란도 필요하다." 이 윌포드의 대사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의 창조자 아키텍트가 주인공 네오에게 하는 대사와 일치한다. "인간이 내포하고 있는 변수에 매트릭스가 적응하기 위해서는 네오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소설을 많이 읽은 이라면 <설국 열차>를 보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파피용>이란 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커티스가 타냐의 아이를 구하면서 엔진의 톱니에 한쪽 팔이 잘리는 장면을 보면서 꼬리칸의 지도자 길리엄의 모습이 겹쳐보일 것이다. 이는 커티스가 윌포드의 감언이설에서 벗어나 꼬리칸이 하려고 했던 혁명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성경을 아는 이들이라면 남궁민수의 딸 요나를 보면서 성서에 나오는 선지자 요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요나는 신약의 예수를 상징하는 인물로, 윌포드 열차의 잔인한 계급 사회를 깨고 인류를 구원하는 자로 볼 수 있다. 타냐의 아들 티미는 흑인으로 흑인은 인류의 시초를 상징하고 요나는 그 인류의 구원자로서, 또 인류를 번성시킬 자로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설국 열차>에 숨겨진 수많은 의미들을 캐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해석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배경 지식들이 필요하다. 우선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를 모두 봐야하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도 읽어야할 뿐더러, 성경에 대한 지식과 인류 시초에 대한 지식, 상징이라는 문학이론까지 알아야할 것들이 너무 많다. 이런 것들은 소수의 마니아들이나 관련 전공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면 접하기 힘든 것들이다. 당연히 다수의 관객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 그래도 <설국 열차>는 <설국 열차>다



아무리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라고 하더라도 <설국 열차>는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중들이 <설국 열차>에 녹아 있는 기호들을 해석하지 못한다고 해도, 영화 전체에 깔려 있는 메세지는 명확하다. 윌포드가 영원한 엔진을 만들었다고 자부하지만 꼬리칸의 아이들을 부품으로 써야만 하는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에게 사회시스템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느끼게 했다. 혁명은 단순히 꼬리에서 머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고 있는 시스템 자체를 파괴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커티스가 윌포드와 같이 변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한 세계의 파괴가 인류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가 스스로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믿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 열차>의 관객수가 850만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하지만 대작의 척도인 1000만 관객에 이를지는 아직 미지수다. 개봉한지도 벌써 3주나 지난데다가  마지막 뒷심을 발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쨋든 많은 관객이 찾는다는 것은 모든 영화에 좋은 일이기 때문에 <설국 열차>의 1000만 관객 동원을 기원한다.



PS. 인터넷 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양갱을 사가라고 했었는데, 영화를 볼 때 양갱을 미처 사가지 못한 것이 참 아쉽다. 사소하지만 색다른 경험이었을텐데 말이다. 어디서 봤는데, 바퀴벌레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를 완벽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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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BlogIcon sky@maker.so 2013.08.24 09:13 신고 Permalink Modify/Delete Reply

    롱런은 힘든 영화에요. 보통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 수 있는 영화는 아닌듯하거든요.

    하지만 잘 만든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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