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근시를 앓고 있다. 6살 때였나, 한 달 정도 눈병을 앓더니 눈이 급격히 나빠졌다. 가까이서 텔레비전을 보던 습관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때부터였으니 안경과 동고동락한 지도 얼추 25년이 지났다. 25년간 흐릿한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기상 후 초점이 나가 뿌옇게 뭉개진 시야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떠 더듬더듬 안경을 찾는 일은, 우스꽝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숙명이 되어버렸다.

 

안경은 내 삶의 일부다. 만약 안경이 없다면 나는 멀리 있는 어떤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코앞에 있어야만 어떤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삶이란,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시력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 사회가 보이지 않는 삶, 어느 것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근시 사회라 명명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폴 로버츠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다. 그는 <근시 사회>(민음사, 2016)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근시를 앓고 있는 사람이 안경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 모두가 코앞만 바라보며 현재를 소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래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사회가 어떻게 파괴되어버릴지 모르는 것 마냥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 애쓴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어떤 결과로 치달을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파괴된 공동체, 자아의 극대화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재미있게 보았다. 내가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여주인공의 남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쌍문동 사람들이 형성하고 있던 마을공동체였다. 그들은 이웃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일부러 음식을 많이 했고, 스스럼없이 자신의 아이를 이웃에게 맡기고, 마을에 속한 사람이 아프기라도 하면 모두가 병문안을 갔다. 모두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내가 어렸을 적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였지만 옆집 문은 항상 활짝 열려있었고, 나는 그곳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2016, 지금은 어떤가.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나 역시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이웃을 모르니 음식을 나눠줄 일도 없다. 자신의 아이를 만지기라도 하면 학을 떼는 부모가 늘었다. 마을공동체는 파괴되었고, 이제 마을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군집에 불과해졌다.

 

어쩌다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개인을 서로 결속해주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일까. 저자는 이를 자본주의의 문제로 파악한 듯하다. 자본주의는 경제가 끊임없이 성장할 것을 전제로 굴러가는 체제다. 그런데 만약 경제 성장이 멈춘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불안한 미래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확실한 현재를 도모하려 들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일을 팔아 현재를 사는 것이다.

 

과거에는 현재를 팔아 더 나은 미래를 사려했다. 때문에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더라도 그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려 했다. 하지만 1997IMF 사태와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겪은 이후 사회는 경제가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을 잃어버렸다. 결국 사회는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기보다는 보다 확실한 현재를 착취하기로 결정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욕망 추구를 제어하기 보다는 극단으로 밀어붙여야만 한다. 공동체보다는 개개인의 자아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제 사회는 개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스템을 완벽히 구축한 듯하다. 신이라고도 불리는 구글은 나의 검색 패턴을 분석해 내가 소비할 만한 상품을 광고로 제시한다. 스마트폰을 통하면, 손가락만 몇 번 놀렸을 뿐인데도 쉽게 내가 원하는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개개인의 정치성향을 파악하고 개개인이 관심 가질만한 공약과 정책을 선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개인의 욕망 추구가 쉬웠던 때가 있었던가.

 

근시안적인 기업과 사회

 

기업과 사회는 현실을 착취하기 위해 근시안적으로 철저히 변했다. 책은 미국 사회를 예로 들고 있지만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기술에 투자해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기보다 인건비 절감을 통한 이윤 추구를 선택했다. 이를 위해 쉽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통과시키려 안달하는 노동개혁 5대 법안도 같은 선상에 있다.

 

기업에서 인력을 채용하려할 때 경력직을 선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규인력을 채용해 교육하는 시간과 비용이 아까운 것이다. 청년실업률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경력을 쌓을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취업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하는 사회에서 청년들이 살아갈 희망은 없다. ‘헬조선이니 망한민국이니 하는 말들이 청년들 사이에서 괜히 회자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건강을 책임지는 의료 관련 산업은 어떤가. 앞서 언급한 노동개혁 5대 법안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가 통과시키려 애를 쓰고 있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의료산업이 영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법이다. 만약 의료산업이 영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건강보다 의료 서비스나 약의 매출이 우선시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콜린 클라크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는 드물다. 정치꾼만 득시글거린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기보다는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자신이 속한 당의 공천을 받으려 애쓴다. 다음 선거에 이기기 위해 온갖 막말도 서슴지 않는다. 이 같은 사회에서 과연 미래를 찾을 수 있을까.

 

공동체의 회복을 위하여

 

미래의 암울한 전망은 장밋빛으로 변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는 근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잃어버린 공동체의 회복을 주장한다. 개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길 멈추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자고 요청한다. 그런데 저자의 요청에 응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궁금하다.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의 사람들은 지금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것이라 자조(自嘲)하는 데 자신의 심력을 소모하고 있을 뿐이다. 안경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한줄기 기대를 거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룬 경험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의 아름다웠던 공동체를 우리가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욕망을 유보하고,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한 공동체를 꾸리려는 시도 자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저자가 책 말미에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다음 용기를 내야 한다.

 

남들을 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이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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