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4시간, 1440, 86400. ‘시간은 인간이 평등하다고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다. 소유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만은 결코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모두 하루 24시간의 지배 하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노오력을 신봉하는 자들의 도구로 종종 사용되곤 한다.

 

정말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일까. 24시간, 1440, 86400, ‘시간이란 수사로 추상화된 삶은 인간 모두에게 평등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각자의 시간이 자본에 의해 노예화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시간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주장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

 

대학생을 예로 들어보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든든한 뒷배가 있는 대학생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대학생은 불안한 생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만 한다. 밤늦게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며 공부하는 대학생과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대학생이 과연 같은 시간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대학생뿐만이 아니다. 모두 각자 자신의 시간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간다. 별다른 의문 없이, 돈 없는 것을 자조하며 주인의 핍박을 견디며 살아간다. 돈 없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시간조차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삶을 우리는 그저 견디며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2012년 겨울,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는 그저 망상일 뿐일까.

 

저당 잡힌 시간, 소진되는 삶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코난북스, 2015)는 그동안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시간문제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책은 시간문제가 단지 시간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노동체제, 부채, 디지털화, 부동산, 사교육 등 사회 전반의 것들과 긴밀히 연계돼 우리의 삶을 소진시킨다고 폭로한다.

 

먼저 부채와 시간의 관계를 살펴보자. 한국 사회는 현재 빚잔치를 연일 벌이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가계부채는 1166조 원에 달한다. 그럼에도 빚내서 집사라는 언설이 난무한다. 부동산뿐인가. 대학생 중 태반은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을 안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 사회에 나와도 일자리는 없고, 빚 갚을 길은 요원하다.

 

빚은 미래에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믿음을 화폐로 교환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래를 담보로 돈을 빌린 것이다. 이는 미래를 되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시간으로 강제된다. 금융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미래는 신용등급 일람표와 부채의 규모가 설계”(37)하는 것이다.

 

갚아야할 부채가 얼마 남았고, 더 빌릴 수 있는 여지가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미래의 시간 앞에 놓인 개인은 미래가 안정적이길 바란다. 미래가 예상을 벗어난 모험의 시간이 되기보다는 연체 없는 분할 납부가 가능한 시간이길 희망한다. 그러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개인의 현재는 더욱 제약될 수밖에 없다.”(37)

 

디지털화는 어떤가. 기술발전으로 시스템 대부분이 디지털화된 사회는 표면적으로 시공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전세계가 디지털이라는 기술로 연결돼 있고, 재택근무, 프리랜서 등 새로운 형태의 직업도 생겨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발전은 도리어 개인의 시간을 얽매 주체적인 시간 활용을 가로막는다.

 

언젠가 빨리 파일을 보내라는 상사의 메시지에 1% 남은 배터리를 보며 폰이 죽으면 나도 죽겠지읊조리는 직장인의 모습이 나온 한 TV 광고를 본 적이 있다. 과거에는 퇴근하면 직장인은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화된 세상에서 퇴근이란 단어는 없다. 회사를 벗어나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항시 대기상태에 놓인다.

 

내내 일하지는 않지만 항상 일할 태세가 되어 있기를 요구하는 방식. 이러한 노동 패턴은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 간의 경계를 파괴하고,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의 시간 가운데 어느 부분도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는 이를 특별한 종류의 빈곤으로서 시간의 빈곤이라고 말할 수 있다.”(55)

 

대표적인 예 두 가지만 소개했지만, 시간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다양하다. 공부하기 좋은 나이라며 청소년의 시간을 모두 공부에 쏟아붓도록 만든다. 또 산업재해가 일어나도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작업을 중지하지 못한다. 인건비 절감, 상사의 눈치, 의미 없는 회식 등 강제된 야간 노동도 빈번하다.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나.

 

장시간 노동 체제는 우리의 시간, 가족의 시간을 빨아들여 몸집을 불려 양적 성장 중심의 사회를 지탱했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일하는 기계가 되었고, ‘돈의 노예가 되었다. 이웃과 동료에 연대하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눈감고 오로지 나와 가족의 생존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심성을 갖게 되었다.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내가 살아남으면 된다는 보수적인심성 또한 갖게 되었다.”(120)

 

이는 사람들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는 사회의 문제다. 우리는 이 같은 사회의 행태를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사회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삶을 모두 소진시키기 위해 더욱 가혹한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자는 인식을 깨뜨리고 우리의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찾은 노동계급 자료보관소에서 뜻밖의 자료를 발견한다.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이 남긴 자료에서 저항의 난폭한 표현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노동자들이 선술집에서 형이상학을 논하고 저녁에는 인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자신들만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다룬 자료를 발견한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 자료를 통해 노동자들도 철학과 예술적 글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노동자들도 철학자나 예술가와 같은 동등한 사람이며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도출해내고, 이를 프롤레타리아의 밤: 19세기 프랑스에서의 노동자의 꿈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정리한다.

 

이 내용을 언급한 것은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저당 잡은 사회의 은폐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 외에 답이 없다는 뜻이다. 철학과 예술을 통해 사회를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자는 인식을 버리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자. 다음날 노동을 위한 재충전으로 소중한 시간을 버리지 말자.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철학과 예술을 통해 우리의 삶을 한 단계 성숙시키자. 우리는 모두 철학자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자문하자. 우리는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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